안부를 묻는 말에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 하루하루 사느라 바빴다. 앞으로 뭘 하며 살 건지 스스로에게 물어봤지만,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떻게 살지 고민하는 건 죽을 때까지 하는 거라지만 너무 계획 없이 생각 없이 사는 거 아닌가. 잠들기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면 막막해진다. 한 치 앞을 모르는 내일을 불안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올여름, 하자센터에서 미래의 일터를 상상해보는 자리가 열렸다. 다양한 청소년들이 모여 각자의 일 경험을 나누고 우리 세대에게 일이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지 이야기했다. 나와 산하는 대학에 가지 않은 비대학 청년으로서 고민을 내놓았다.
산하: 저는 앞으로 그림 그리면서 살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리면서도 이걸로 먹고 살 수 있을까 불안하고, 요즘은 한창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데 이렇게 게을러서 나중에 어떻게 될까? 과연 미래에 생존이 가능할까?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먹고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고 싶어요.
#산하 #대안학교 졸업 #대학 갈 생각없음 #맛있는걸 #좋아하는비건
나무: 나처럼 대학에 안 간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야 제 미래도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아니 멋지고 대단한 사람들 다 제 나이에 대학에 갔는데, 저는 안 갔잖아요!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서 물어보고 공감하고 싶어요.
#나무 #일반학교 졸업 #대학 거부 #요즘관심사는 #생활리듬만들기 #SF소설읽기
그러다 비슷한 상황에서 먼저 고민해본 누군가를 만나보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맹목적으로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사람. 그들을 만나 당신의 10년 전은 어땠는지 또 지금은 어떤지 말을 건네 보면 조금 안심되지 않을까? 우리의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이름 하여 <잘 살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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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손님은 하자작업장학교(현재 은평구 크리킨디센터로 이전) 졸업생인 '홍조'다. 사실 나무와 산하도 홍조가 뭘 하는 사람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여러 사람을 물색한 결과,
1. 대학 비진학2.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먹고사는3. 여성
이 세 가지 키워드에 쏙 맞는 인물이 바로 홍조였다.
홍조의 이야기
비대학 그 이후
인터뷰 요청 메일에 수락의 답을 받고 얼마 후, 마을 책방에서 홍조를 만났다. 홍조는 오랜만에 온 하자가 낯설고 신기한 모습이었다. 2009년 당시 18살이던 홍조는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 1년을 다닌 뒤 내린 선택이었다. 하지만 홍조가 하자작업장학교를 다니던 그 무렵 학교 문을 닫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홍조 2009년은 하자가 만들어진 지 딱 10년이 됐을 때다. 10년 전과 10년 후가 청소년도, 한국의 사회문화적 상황도 달라 더 이상 지금 모습의 학교가 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 모토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먹고살자’ 이었는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 살 수 있나? 하고 싶은 일이 있나? 그게 정말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일인가? 그런 질문들을 하며 학교가 없어졌다. 몇 명의 친구들이 남아서 시즌 2 학교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꼬박 2년이 걸렸다. 이때 벌새 이야기(크리킨디이야기)가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를 모토로 학교를 만들고 1년간 신입생들과 함께 다닌 후 졸업했다.
졸업한 이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홍조 졸업하자마자 성미산 학교에서 인턴 교사로 근무를 하게 됐다. 원래는 6개월 동안 일하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6개월을 더 해서 1년을 성미산학교에 있었다.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당시 나는 작업장학교에서 배운 ’생태·평화·함께 살기‘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졸업 이후 배움을 어떻게 실천할지 잘 몰랐다. 그러다 실천은 교육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해 인턴쉽을 하면서 대안학교 교사 양성을 위한 ‘삶을 위한 교사대학‘에 함께 하고, 한창 4대강 반대운동을 하던 양평 두물머리에 가서 함께 지키며, 4대강 사업 반대운동을 열심히 하기도 했다.
그러다 개인적인 이유로 이런 일들을 마무리하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대학교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변 친구들이 대학에 가기도 했고, 나도 다음 스텝을 어떻게 해나가야 할지 몰랐었다. 그래서 대학 입시를 했고 그리고 정말 다행히도, 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에 떨어졌다. 대학에 지원을 안 했으면 후회했겠지만, 지원해서 원했던 학과에서 떨어졌다.
대학에 가려던 이유를 물어봐도 되나?
홍조 하자작업장학교에서도 영상전공이었고,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회활동을 영상의 힘으로 하고 싶을 때였다. 그래서 한예종에 있는 방송영상과를 지원했는데 떨어졌다. 그 당시에 나한테 “네가 하고자 하는 방향이 뚜렷하니 그럼 그냥 학교 안 가고 하면 어때?”라고 이야기해 준 친구가 있었다. 보라(이길보라)라는 친구인데 마침 그 친구가 장편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걸 주제로 자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했고, 나도 자신의 이야기, 가족, 주변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문화적인 이야기, 아주 작은 것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아주 많았었다. 그때 보라가 자기 프로젝트를 꾸리며 나에게 조연출 겸 프로듀서로 일하겠냐고 제안했고, 우리는 같이 공부를 해보자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15년부터 시작해서 본격적으로 16, 17년 2년간 빡세게 작업을 해서 다큐 <기억의 전쟁>을 완성했고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을 했었다. 곧 개봉을 앞두고 있다.
나무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 나도 대학에 지원했지만 떨어졌고 그걸 내 인생 제일 행운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홍조 왜냐하면 붙었으면 다녔을 거니까, 나는 대학에서 합격 안 시켜줘서 감사하다.
나무 맞다. 내가 대학을 생각했던 건 홍조처럼 관심 있는 분야가 있었기 때문에 자발적인 면도 있지만, 반쯤은 타의에 의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안 가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안 가서 얻을 수 있었던 것들이 많았다. 그래도 전공에 대한 관심은 계속 남아있고, 공부하고 싶은 욕망도 있을 텐데, 홍조는 어떤가?
홍조 나도 몇 년 전에는 조급함이 있었다. 잘 살고 있는 거 맞나? 더 열심히 해야 하나? 이렇게 놀고 있어도 되나? 이런 마음이 한편에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막 몰아붙이는 마음도 있었다. 중도가 없으니까 힘들었다. 계속 과로에 시달렸다. 일도, 공부도 해야 하는데 욕심이 많아 제대로 들어오지 않고 항상 배운 것과 내 언어에 불일치가 있었다. 이제야 10년 전에 하자작업장학교에서 에세이 쓰고 배운 것들이 다가온다. 배움에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했다. 바로 알 수 없고 배움과 경험은 다 연결되어 있어서 바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 그걸 알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답이 없다. 이런 건 사실 나한테도 답이 없다. 이 인터뷰에서 중요한 거는 답은 누구한테도 없다는 것 같다. 자기가 만들어 가는 거고, 누가 자기를 대신할 수 없다. 자기만큼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많이 생각해야 된다, 자기 것을.
아까 했어야 했던 질문인데,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유는 무엇인가?
홍조 여럿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인문계 고등학교를 들어가면 졸업 후 다음 '정답지'는 대학이다. 어느 대학을 가고 싶은지 모르면 어떻게 해? 심지어 대학을 갈지 말지에 대한 선택지도 없다. 그러면 내가 3년 동안 여기(일반 고등학교) 있는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며 자퇴를 했다. 하자작업장학교에 입학하고, 소위 문화·예술 대안교육 판에서 일하면서 산 지 10년째다. 자퇴는 180도 인생이 달라지는 선택이 아니다. 답이 대학밖에 없는 곳에서 '나는 다른 선택을 하겠다. 1도 정도 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가보겠다' 한 게 지금까지 10년이었다. 올 초에는 회사를 그만두면서 그럼 나는 다시 1도 정도 방향을 다시 틀어서 '앞으로 10년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더 돌볼 수 있는 일을 해야겠고, 이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 생각했다. 들어오는 일도 안 받았고 요가와 명상 티칭에만 집중하려 했다. 그래서 물리치료 해부학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내년에 대학을 갈 거다. 내가 하려는 일을 더 잘하려면 선생님도, 학위도 필요하다. 나는 이 선택을 여러 경험들이 쌓여서 10년 만에 내릴 수 있게 됐다. 인생에서 열여덟, 열아홉은 얼마나 어린 나이냐. 100세 시대인데 그 나이에 앞으로의 길을 딱 한 번 결정한다는 건 너무 리스크가 크다. 대학을 한 번만 갈 필요도 없다.
내가 지금 인터뷰에서 하고 싶은 말은 당장 하고 싶은 일이 눈앞에 없을 수도 있는데, 그러면 뭐 어때. 그게 서른, 마흔, 쉰에 찾아질 수도 있다. 인생은 너무너무 길다. 경험이 없는 게 어릴 땐 당연하니 선택을 잘못할 경우의 수도 많다. 너무 자기 스스로를 몰아붙이지 말고 시간을 두는 것도 필요하다. 저는 또 10년 후에 다른 걸 할 수도 있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 수 있지만, 여기까지 방향을 정하고 오는 데 10년이 걸렸다. 아직 잘 모르는 게 너무 당연하다. 여전히 진로는 탐색하고 있고 정해진 답이 없다. 그래서 어려움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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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 나무 10년 뒤에 홍조를 또 만나보고 싶다.
홍조 10년 뒤에 어떻게 될지 모른다, 10년 전에 둘 다 뭐였나? 초등학생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대견해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고민할 수 있다는 게 대견하다.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엄하고 혹독하다. 너무 그러지 않았으면. 나 스스로에게도 계속하는 이야기다. 당장 생존의 위협이 있지 않은 한, 스스로를 너무 타박하며 스트레스 받고 그러지 않았으면.
대학이 필요했던 순간도 있었나?
홍조 여태껏 없었다. 필요했으면 갔을 거다. 노력한 것에는 늘 결과가 뒤따르는데 내가 12년 동안 대학 입시만을 생각하고 준비한 사람을 이길 수 있을까? 나는 똑똑해서 1년만 하면 붙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 1년 동안 너무 힘들었다. 내가 지원한 학교는 수능을 보지 않고, 학교 자체 시험으로 진행해서 과목 수가 적었다. 영어랑 수학만 하는데도 이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안 된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게다가 분명 내 성격이었으면 대학 붙었으면 학비는 내가 냈을 텐데 내가 그걸 어떻게 감당할까, 학비 없어서 떨어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농담으로 했다.
대학의 필요성은 없었는데 친구의 필요성은 컸다. 또래 친구들이, 나이대가 또래이기보다는 같이 일하거나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이 없을 때 힘들었다. 근데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줄 알았는데 모두가 이렇게 생각하더라, 만들어진 인연에 감사하며 살아가야겠다 생각을 많이 했다.
일과 생계유지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인가?
홍조 여러 가지 일들이 기억에 남고 인상에 깊지만, 그중 2016년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안에서 진행한 <불확실한 학교>라는 프로젝트를 소개하고 싶다. 예술과 기술을 가르치고 배우는 아주 일시적인 학교를 비엔날레 안에 만드는 프로젝트였다. 장애/비장애 모든 사람이 함께 할 수 있는 학교, 학위를 위해서거나,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서 같은 확실함을 위한 학교가 아니라 우리의 불확실함을 더 잘 인정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었던 시간이었다. 새로운 것을 더 배우기보다는 알고 있는 것을 “탈학습”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배우고 알게 된 것이 많았다. 거기에서 프로젝트 전반적인 진행을 돕는 코디네이터로 참여했다.
지금은 무슨 일을 하며 지내나?
홍조 최근까지 일한 직장은 종로에 있는 갤러리이자 코워킹스페이스, 예술기획사 같은 일을 하는 '팩토리'라는 곳이다. 3년을 꼬박 거기서 일을 했다. 갤러리다 보니 주로 전시기획, 전시 외에 예술상품을 만들거나 이 공간 밖에서 일어나는 예술 프로젝트에 관여하면서 운영되는 회사였다. 최근에 그만두고 지금은 프리랜서 요가, 명상 강사로 일하고 있다.
2018년 언리미티드 에디션에서의 홍조. "애서가를 위한 요가"
앞서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3년간 했다고 말했는데, 다 작업하면서 했던 일인가?
홍조 이때는 일이 들어오면 에너지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동시에 여러 가지를 했다. 다큐멘터리 작업은 금방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텀이 되게 길다. 촬영을 하러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는 베트남에서 해외촬영을 하는 것이라 자주 갈 수도 없었다. 일을 진행하되, 사이사이에 계속 다른 일을 했다.
다큐 작업을 하며 남는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한 5개씩 했다. 요가 학교에 다녀서, 요가 자격증이 생겼다. 그래서 요가 티칭도 하고, 티칭이 없는 날에는 호텔 조식 아르바이트, 카페, 식당 여러 알바하며 지냈다. 프로듀서 일이 여러 가지를 잘 케어하고 조율하고 연락하고 확정 짓고 예산 만지는 일이다 보니, 그걸 할 수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주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 나는 운이 좋은 케이스라고 생각한다.
나무 과로에 계속 시달렸다는 이야기가 공감된다. 나도 일이 들어오면 무리해서라도 기회를 잡으며 계속한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하고자 함이었지 마구잡이로 일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후회했다. 홍조는 과로의 늪에서 빠져나왔나? 지금은 어떤가?
홍조 요새는 과로 안 한다. 안 한지 꽤 오래됐다. 내가 일을 과하게 하다 과부하에 걸려 일을 못하면 그건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이걸 인지하면 조금 편해진다. 내가 무리한 결과가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우리 모두가 슬로우다운 하려면 내가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한다. 많은 것을 하는 것보다 하나를 잘 끝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바쁠 수 있을 때 바쁜 것도 괜찮기도 하다. 바쁜 시간이 자기한테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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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조가 일을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홍조 돈을 받는 일은 나한테 돈을 주니까 한다고 심플하게 생각한다. 먹고살려면 돈이 필요해서 돈을 주는 일을 한다. 이런 일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마음이 동해서 하는 일도 있다. 특히 돈 받는 일은 큰 의미를 두지 않고 되게 성실하게 한다. 항상 생각한다. 나의 노동이 이만큼의 값어치가 있는가? 부합하지 않으면 값을 올리거나, 내리거나 한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이다. (웃음) 그게 딜이 안 된다면 일의 강도를 조절한다. 돈 받은 만큼만 한다고 생각하면서. 돈은 하나의 일과 같은 개념이라서 아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다.
나는 지금 혼자 삶을 꾸리고 있는데 그러면 매달 고정비용 월세, 공과금 등등 이게 머릿 속에 있다. 내가 적어도 한 달에 얼마를 벌어야 한다는 현실이 있고, 절대 무시 못 한다. 숨만 쉬어도 나가는 돈, 먹고 살고 하는 최소비용이 얼만지, 거기서 여가비용의 예산을 짜고 난 후 생활을 굴린다. 나는 다른 게 워라밸이 아니라 이런 게 워라밸인 것 같다. 그걸 현실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내가 필요한 게 뭔지, 뭘 위해서 일하는 지가 생긴다. 돈을 좇으라는 말이 아니라 내가 사는 데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한가? 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을 생각해야 한다.
프로듀서 일은 더 안 하나?
홍조 안하기로 했다. 그게 잘하는 일이라는 걸 알지만, 10년 전과 지금에 가장 크게 달라진 건 내가 한 번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어느 순간에는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하는 걸 알고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은 실질적으로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는 것, 내가 그걸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프로듀서 일도 잘할 수 있고 보람도 있고, 뜻깊은 일이지만 나는 매일 매일을 더 중요시하게 됐다. 나는 일상생활이 중요한 사람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게 너무 중요하다. 일탈이나 여행보다 매일매일, 순간순간을 잘사는 것에 더 보람을 느낀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프로듀서 그런 직업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렸을 때 꿈이 뭐니? 물으면 소방관 경찰관 직업군을 이야기하는데 요즈음 4차 산업혁명으로 없어지는 직업들이 나온다. 직업은 없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직업의 타이틀에 의존할 필요는 없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자기의 자질과 경험들이 바탕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것 같다.
요즘 어떻게 먹고 살고 있나?
홍조 요새도 일한다. 요가 수업도 명상 수업도 한다. 회사 그만두고 7, 8, 9월 3개월 동안 뉴욕에 다녀왔다. 거기서 운동하고 요가센터 휘트니스 센터들을 둘러봤다. 올해 1도 트는 방향이 그런 쪽이었으니까. 근근이 먹고 산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인터뷰에 다 담진 않았지만 홍조에게 많은 것들을 질문하고 들었다. 취업과 같은 진로 선택부터 집에서 나와 사는 경험은 어떤지, 귀농할 생각이 있는지, 자퇴 후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는지 등등. 홍조에게 물었던 많은 것들은 스스로에게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 혼자로는 답을 내지 못해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당신은 삶의 문제들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해결해나가고 있는지, 결국 지금 잘 살고 있는지. 홍조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감하면서 머리 한 구석 내가 가지고 있는 질문들에 예시 답안을 하나씩 적어놓았다. 어차피 홍조와 나는 다른 사람이고, 똑같이 살 생각도 없다. 그저 내게 예시 답안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다.
홍조와의 인터뷰를 마칠 때쯤, 홍조를 10년 뒤에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다시 했다. 홍조의 1도가 또 어떤 방향으로 그를 이끌지 궁금해졌다. 그러자 홍조가 말했다. 10년 뒤에는 아마 10년 뒤의 사람이 당신들을 인터뷰하고 있을 거라고. 우리의 10년 뒤는 어떨까? 우리가 나눌 경험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우리에게 홍조가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