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2월 1일 개관식 직전의 하자
하자야 고마워
하자가 생긴지 이십주년이라고 준비모임을 한다고 해서 다녀왔다.
하자 동네를 만든다고 분주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스무 살이라니!
그 해, 1999년은 급작스런 IMF 구제 금융 소식으로 나라가 휘청거리던 때기도 했지만
“영화 한편 흥행수익이 자동차 회사 1년 수출액과 맞먹는다”거나
“하나만 잘 하면 대학 간다”는 말이 오가던 때였다.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음을 곳곳에서 감지할 수 있었던 시점이었다.
어른들은 ‘문화의 세기’ ‘문화 산업’ ‘열린 교육’ 등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됐어, 됐어, 이젠 그런 가르침은 됐어>를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몸에 맞는 세상을 찾아 학교 밖으로, 가족의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때마침 “스스로 업그레이드 하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작업장 중심의 청소년 활동공간을 연 하자센터로 그들이 모여들었다.
하고 싶은 것이 있는 청소년들이 전국에서 모여들었다.
하자 이름을 지은 아트 디렉터,
그가 그린 스스로 물을 주는 화분의 꽃 그림을 기억하는가?
“우리의 삶을 스스로 업그레이드 하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먹고도 살자.”
그리고 하자의 일곱 개의 약속이 만들어졌다.
많은 모이면서 즐거워했던 내 마음 속에
어느 날 아침 그냥 정리 되어서 나온 것이 그 일곱 가지 약속이다.
하자센터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면 되고
하고 싶은 것이 없으면 기웃거리거나 빈둥거려도 되는,
‘자기 주도 학습자들의 놀이터’이다.
각자 방식으로 놀고 쉬고 궁금해 하며
스스로 배워가는 기쁨과 우울함에 겨워하는 ‘창의적 자율 공간.’
하자의 탄생에 관여한 나로서는
‘자율적 존재’가 된다는 것이 쉽지 않은 토양에서
이십년이라는 긴 시간을 자율공간의 면모를
끄떡없이 버텨온 하자가 자랑스럽다.
대중(음악)방, 영상방, 디자인 작업장, 웹 작업장,
하자 콜레지오, 하자 작업장 학교, 노리단, 오요리,
영셰프, 로드스꼴라, 목화 학교, 오디세이학교,
유자 살롱과 소풍가는 고양이 등 하자에서 싹이 튼 많은 사회적 기업들,
자전거공방과 텃밭, 마을 서당과 도서관, 마을 장터,
기억력이 아주 나쁜 나는 많은 이름들을 빠뜨렸겠지만 섭섭해 하지 말기를!
작명의 달인들이 사는 하자 동네는
그 많은 기발한 이름의 수 못지않게 창의적 활동들이 이어졌었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곳에 아주 오래 머물렀던 사람도 있고
아주 잠시 거쳐 간 사람도 있다.
누구는 영화감독, 작가, 공연자, 디자이너, 정치가, 창업자가 되었고
딱히 어떤 명칭으로 표현할 수 없는 복합 작업자이자 자율적 시민으로
지금의 나/우리/그들로 서로의 곁에, 또는 멀리 살아가고 있다.
나/우리를 나/우리로 있게 한 하자,
그 누구의 것도 아니면서 나/우리의 것인 하자,
우리 모두의 공동의 기획이자 공유의 시간이자 장소인 하자,
그와 함께 한 20년의 시간에 감사하고 싶어진다.
“하자야 고마워!”
세금을 제대로 배분한 “서울시 고마워,”
울타리가 되어준 “연세대도 고마워”
이곳을 거쳐 간 많은 “판돌과 죽돌, 고마워”
사회적 기업을 차려 동분서주하던 “청년 사회적 기업가들, 고마워”
잠시 스쳐갔던 이름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고마워”
그 무엇보다도 하자가 있어 참 다행이라며
지지와 성원을 보내주신 서울 안팎의 시민들, “고마워.”
20년 전 예상했던 세상과는 많이 다른 세상이 와버렸지만
AI와 생명공학 시대의 존재에 대한 물음이 깊어지는 이 시간,
디지털 시대의 공부법을 익혀가는 이 시간,
‘따로 또 같이’ 공부하며 스스로 내 길을 만들며 '하자’에서 동네를 만들어 지냈던 시간이
새삼 그립지 않은가?
아무리 바빠도 미운정 고운정 든 이들도 보고 자신의 어린 시절도 돌아보면 좋겠다.
2019년 9월
조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