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노자 선생님 발표 잘 들으셨나요? 이제부터 저희가 청소년의 입장에서 좀 더 생생하고, 어쩌면 좀 더 과격할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희는 10대연구소의 연구원 입니다. 저는 성윤서 이고요, 하자 이름은 나무입니다. 뒤에 서있는 분들의 이름은 갈민경, 정혜린 이고요, 하자 이름으로는 은별, 삼색이라고 부릅니다. 저희는 작년과 올해, 10대연구소에서 10대의 시선으로 우리의 고민과 사회 문제를 연결하며 우리 각각의 불안과 질문을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어떤 연구를 했는지, 궁금하시죠? 저희의 발표를 잘 경청하시면 곳곳에 숨어있는 연구 내용을 확인하실 수 있을 거에요. 그럼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청소년이 행복한 대한민국, 가능할까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작년 10대 연구소에서는 청소년의 삶에 관한 연구를 했어요. 그 중에서 저희가 가장 충격받고 또 흥미롭게 생각한 인터뷰 속 일화가 있습니다.
한 청소년이 말하길, 학원에서 치르는 쪽지시험과 숙제들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다고 했더니, 부모님이 컨닝페이퍼를 만들어줬다고 합니다. 좀 무섭지 않나요?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다고 하면, 학원을 끊거나, 숙제를 줄이거나, 다른 진로를 찾는게 아니라 학원 시험의 컨닝페이퍼를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이것이 한국 사회가 청소년을 대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이 청소년에게 자주 느끼게 하는 감정이 있어요. 무엇일 것 같나요?
‘내가 잘못된 거 같다’ 라는 느낌입니다. ‘. 아닌 걸 알지만, 학교에 있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게 돼요. 학교에서 나는 9등급의 인간이기 때문이죠. 어떤 등급이든 마찬가지긴 해요. 내가 9등급이라고 점수 매겨진 요소는 성적뿐이지만, 나라는 인간의 모든 것에 반영됩니다. 학교의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대하고 우리 엄마는 9등급 엄마로 취급 받는다고 해요. 우리는 9등급으로 취급 받는 일에 익숙지 않았지만,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왜냐하면 그래도 여기서 살아야 되니까. 9등급 인간이 학교에서 생존하기란, 참 막막합니다. 혹시 여러분도 등급 매겨지고 있나요? 그건 어떤 느낌인가요?
이런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기를 미워하고, 야자를 하루 건너뛰는 일에도 죄책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렇지만 다들 약속한 것처럼 속마음은 꺼내지 않지요, 그냥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연구 인터뷰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생각을 그만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생각을 하면 더 힘들어지기 때문에, 한국 사회는 결코 바뀌지 않을 거기 때문에, 많은 10대들이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10대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또 이곳에 계신 여러분도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경험이 있지 않으신가요? 더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한 이 곳의 미래는 과연 어떨까요?
학교에서 내가 극복해야 하는 것은 9등급뿐만은 아닙니다. 나를 이루는 것들 중 ‘학생다움’에서 어긋난 것을 숨기거나 극복해야 해요. 예를 들면 1년을 꿇었다는 점, 대안학교를 갔다 왔다는 점, 대학을 갈 생각이 없고, 채식을 한다는 점과 같이 많은 것들. 그것들의 다양성은 존중되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이런 것들은 다양성이 아니라 경로이탈이고, 바로잡아야 할 요소가 됩니다. 나 답게 사는 것이 불가능한 학교에서 청소년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요?
사실 청소년은 정말 다양하게 살아요. 다들 그렇듯이요. 각자의 삶이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죠. 작년 10대 연구소에서 청소년 성소수자에 대해서 연구를 했었어요. 청소년 성소수자는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거의 드러나지 않잖아요? 연구를 통해서 알게 된 거는 성소수자가 청소년일 때, 청소년들은 ‘그거 다 성장기라서 겪는 혼란이야’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거였어요. 근데 이거 여기서만 나타나는 거 아니지 않아요? 청소년이 정치에 관심을 가져도 저건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라고 하고, 청소년의 다양성과 개성은 반항이나 ‘중2병’이라는 말로 치부됩니다. 그렇게 청소년 개인의 정체성은 지워집니다.
자퇴한 저도, 특성화고에 다니는 동생도, 인문계를 다니며 미술입시를 준비하는 친구도 모두 청소년이지만, 우리는 다 다르게 살고 있어요. 각자만의 삶을 살고 있죠. 다들 그러듯이요. 근데 우리 모두가 각자의 독특한 삶과 일상을 존중받고 있을까요?
궁금합니다. 청소년이 행복한 대한민국을 함께 만들어 갈 어른이라는게 현실에 있을까요? 청소년이 자기의 성장을 도와주는 사람을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아요. 아침에 교문을 통과할 때면, 선생님들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우리를 스캔 하고, 교칙과 맞지 않는 조그만 부분까지 잡아내요. 학번을 묻고 벌점카드를 주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 보면, 쌤들이 되게 이 일에 열정이 가득하다는 건 알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왠지 쌤들이 저한테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학생을 향한 학교의 관심은 되게 편향되어 있어요. 그러니깐, 진짜 나한테 중요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다는 거죠. 특정 부분에만 관심을 가져요. 놀랐던게, 담임 선생님이 저만큼이나 1대1 상담을 싫어하시더라고요. 되게 괴로워 하시고... 이해는 가요, 굳이 소통할 생각도 없고 소통이 될거라는 기대도 없으니까 그 시간이 괴로울 수 밖에 없겠죠. 그들은 저를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요.
그렇게 학교에 있다 보면 빠르고 거대한 기계 속에 작은 불량부품이 된 거 같은 느낌을 받아요. 저는 계속 치이고 깎이지만, 나 때문에 기계가 망가지는 일은 없어요, 그냥 나만 점점 깎이는 거죠. 깎여서 둥글둥글해 지고, 더 깎여서 점점 없어져 가는 거 같아요.
학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의 모습은, 서열이 지배하는 교실에 드러납니다. 10대 연구소에서 교실 내 서열에 대해 연구한 바에 따르면, 결국 사회의 기준과는 약간 다른 사람들, 혼자 있기 좋아하거나, 조용하거나, 주류와 다른 생각을 한 사람들이 배제 당한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서열이 낮으면 즐거워야 하는 수련회도 고통이 돼요. 그렇지만 획일적 기준을 강요하는 교실의 문제같은 건 보이지 않고, 차별 받은 건 그들이 이상한 탓이 됩니다. 학교 안에 있어도, 학교 밖에 있어도 다양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는, 기준과 다른 사람들이 차별당하고 밀려나는 사회는 과연 행복한 사회일 수 있을까요?
그래도 우리는 청소년이 행복한 대한민국에 대한 믿음을 놓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는 청소년에게, 또 대한민국에게 가능성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야만 하고 말이죠. 청소년에게는 뭐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십대연구소가 생각하기에 청소년에게 필요한 것은 공간, 기회, 사람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가 모두 만족스럽게 충분한, 아직은 오지 않은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까요?
공간
먼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여러분, 청소년의 영역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청소년의 가질 수 있는 공간은 주로 엎드리면 꽉 차는 작은 책상 하나일 때가 많습니다. 너무 답답하겠죠?
청소년의 영역은 더 넓고 안정된, 새로운 공간들로 확장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대한민국에는 어느 동네, 어느 분야에든 청소년이 있고, 그들이 새로운 실험을 하고 모이고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몇 시간씩 죽치고 앉아있어도 돈을 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이런 공간에서 지금 겪고 있는 삶 외에 또 다른 삶을 꿈 꿀 수 있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많은 청소년들이 머물고 있는 학교 역시 포용적인 공간이 돼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는 낙제자가 없고, 학생들은 시험의 부담에서 가벼워져 있습니다. 시험을 잘 보면 좋은 일이 있을 수 있지만 망쳐도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는거에요. 또 학교 멘토링 시간에 그 학교의 자퇴생이 오게 됩니다. 대학에 잘 간 선배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갈 생각이 없었던,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꾸리는 데에 학교도 함께 하게 되는거에요.
기회
두번째는 기회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언제든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야 합니다. 사회는 청소년으로 하여금 늘 늦었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여러분도 혹시 매일 듣는 말 아닌가요? 늦었다. 좀 더 빨리 했어야 한다. 한 두살만 더 먹어도 대학을 준비하거나 공부를 하기에도 늦었고, 꿈을 찾는 것도 늦었다고 하죠. 다만 아이러니 한 점은 좋아하는 것을 해보고 싶다고 하면 그것은 대학가서 해도 안 늦었다고 하는 겁니다. 무언가를 시도해보기에는 이른데, 동시에 이미 늦었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학교에서, 또 학원에서 선생님을 비롯한 어른들이 많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쟤네들은 이미 뛰고 있는데 너는 지금 시작하는 거잖아. 너무 늦었어 죽기 살기로 해야해” 다른 사람들이 뛴 다는 게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혹시 우리 모두 한 방향으로 뛰고 있다는 걸 상상하고 있다는 게 아닐까요?
대학에 가지 않는다거나 어른들에게 인정받을 수 없는 미래들은 너무도 쉽게 청소년 당사자가 아닌 남들이 선택지에서 빼버립니다. 내가 남들과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가, 학교가 인정한 차별점만 경쟁력으로 남겨집니다. 하지만 그것도 많이 다르면 안 됩니다, 쓸모 있다고 말해지지 않는 다름은 쉽게 무시됩니다. 다시 쓸모 있는 다름을 지닌 청소년들만이 승리자가 되고요.
그 틀 안에 들어가지 않은 청소년들은 어디 갔을까요? 우리는 정말 이런 경쟁을 원했을까요? 언제까지 청소년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며 버텨야 할까요? 이제 이런 것들을 바꿔가야 할 때입니다.
사람
학교에서 가장 많이 보는 얼굴 선생님이 아니라 친구의 얼굴이 되는 것을 꿈꿉니다. 학교에 가면 친구의 얼굴 보는 거 당연한거 아냐? 라고 생각하시죠. 요즘 청소년들은 학교에 아주 오래있거나 학원에 밤늦게까지 있는데도 누군가와 생활을 공유하거나 마음을 터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10대 연구소에서 올해 10대가 10대에게 묻고 싶은 질문을 모았는데요. “비지니스 친구 아닌 진짜 친구는 어디서 만나?” 라는 질문이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놀라셨나요? 학교 친구는 수행평가 정보를 공유하는 비지니스 관계라고 하더라고요. 당연합니다. 입시의 막바지인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학년에 올라가기 전부터 친구를 안 만들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합니다. 재수학원에 가면 아예 대화만 나눠도 쫓겨날 수 있거든요. 질문해봅시다.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을 나누지 않는 공부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고립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는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세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묻는다면, 먼저 청소년에게 투표권과 자본이 있어야한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이런 공간, 기회, 사람을 접하기 위해선 청소년이 자기 얘길 말할 수 있는, 또 힘을 기를 수 있는 발판이 필요합니다.
행복한 상상을 이야기하는데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미래인데도, 자꾸 우리의 얼굴이 아니라 저 북유럽 같은 나라 사람들의 얼굴로 상상이 되거든요. 여러분도 그러지 않으셨나요? 상상마저도 아직 우리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하지만 저는 청소년이 행복한 대한민국이 가능할거라는 믿음을 멈추고 싶지 않습니다. 청소년의 행복은 곧 전 세대의 행복과도 관련이 있어요.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래의 꿈나무이기 이전에 청소년이 현재를 사는 사람으로 행복하길 원합니다.
맨 처음 이야기했던 컨닝페이퍼 이야기, 기억하세요? 우리는 우리의 삶을 미루고 경쟁에서 혼자만 살아남는 컨닝페이퍼를 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함께 살아 가자고 말하는 포스트잇을 붙일 것입니다. 청소년이 행복한 대한민국이 가능할까? 라는 물음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