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부터 노키즈존이 뜨거운 감자다. 돈 많고 말 잘 듣는 똑똑한 어른들만 갈 수 있는 혐오존이 거리에 곰팡이처럼 피는 이 시기에 9살 동생과 함께 다니는 나의 생각을 나눠볼까한다.
요즈음의 나를 만나는 사람이라면 내 동생 동글이도 함께 보았을 것이다. 맞벌이를 하시는 부모님이 올해 들어 급격히 바빠지자 나는 동글이를 학교 돌봄교실에서 데려 오는 역할을 주로 전담하게 되었다. 동글이는 나와 같이 노는 걸 좋아했고, 내가 더 일찍 데리러 오길 바랐다.내 일정에 동글이와 함께 가기도 했다. 하자에는 이미 자주 왔고 회의를 하는 카페나 이따금 친구 집과 집회 현장에도 오고갔다. 운 좋게도 내가 속한 공동체나 관계에서는 동글이를 아니꼽게 보거나 방해 된다고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고, 다들 처음 만난 동글이에게 존댓말을 썼다. 버거울 때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덕분에 좀더 편안한 마음으로 다닐 수 있었다. 한편으론 동글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 가면서 우리가 어린이를 대하는 방식에 어떠한 시선이 깔려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동생 귀엽지?” 혹은 “동생이 말 안듣지?” 라고 묻는다. 여태껏 그렇다고 대답해 왔으나 최근엔 멋쩍게 웃고 만다. 아직 이런 물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대한 나만의 메뉴얼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동생을 ‘귀엽다’고 할 적도 물론 있었으나 요즈음의 나는 누구도 귀여워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귀엽다는 말은 그를 나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처럼 고민하고 실수하고 허락 없이 만지고 찍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 폴란드의 교육자이자 아동문학가인 야누슈 코르착은 “어린이는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인간이다.”고 말했다. 어린이는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이 아니다. 한 명의 인간이고, 그렇게 대해야한다.
나는 우리가 어린이를 대할 때 ‘귀엽다’는 말로 그가 누려야할 마땅한 대우를 받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땅한 대우란, 그의 말에 귀기울이고 동등하게 여기며 그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것들이다. 잘 생각해보자. 어린이를 만날 때 말 끝날 때마다 귀엽다고 하면서 정작 그와 대화하지 않거나 그의 의견을 덜 중요하게 취급하지는 않았는가? 막무가내로 내 의사를 강요하지 않았나? 내가 어린이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그가 내 말을 잘 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 샤이니 종현이 했던 말 중에서 내가 무척 좋아하는 말이 있다
Q. 막내 태민이가 형들 말을 잘 듣나요?
A. 태민이가 막내라고 해서 우리 말을 꼭 잘 들을 필요는 없어요. 태민이는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아이지, 우리 중 누구의 말도 따를 필요가 없어요.
아무도 누군가에게 내 의사가 중요치 않은 명령을 듣기 원하지 않는다. 스스로 설득되길 바라기에 남을 설득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어린이에게는 그렇지 못할까? 결국에는 어린이가 더 많은 힘을 가진 나의 말에 따라가게 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진상 손님들 중에는 아저씨도 많고 할아버지도 많은데 왜 노아저씨존과 노할아버지존은 없는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귀여워하는 것은 나보다 약하고 작은, 혹은 나에게 위협을 가하지 않는 존재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 존재가 귀여움에서 벗어나는 순간, 과도한 환호는 혐오로 바뀐다. 어린이는 당연히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고 그들 또한 당신이 자라온 것처럼 실수하고 깨닫고 성장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라는데도 말이다.
띠동갑인 우리 남매는 사람들의 예상과 다르게 나이가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큰 요소가 되지 않는다. 아니, 실은 그렇게 되려고 애쓰는 중이다. 나는 하자에서 별명을 부르며 누군가를 마주할 때 그를 그저 '나이가 많은 어떤 사람'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이루는 것 중 하나가 나이'인 경험을 한다. 동글이에게도 나이가 아닌 사람이 보이게 되길 바라고 있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어서 지레 겁먹거나 나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시간이 만든 연륜은 그 사람의 일부이며 그게 누군가의 성숙도를 나타낼 수는 있어도 어른의 완벽함이나 어린이의 부족함을 뜻하는 바는 아니다. 어찌되었던 나와 같은 시간을 지내는 사람인 것이다.
지금 나는 동글이를 애칭 혹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그는 나를 ‘누나’라는 호칭으로만 부르는 것에서부터 나이는 우리를 구분짓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이가 중요치 않은 문제가 되기를 바란다. 과연 가능할까! 나는 사회적으로나 가정에서나 그를 돌봄 해야 하는 역할일 때가 많지만 우리는 좋은 놀이 상대로, 때론 동료나 친구, 지지자의 어디쯤으로 잘 지내고 있다. 나는 동글이를 볼 때 마음이 히터 틀어놓은 것처럼 따닷해질 때가 있다. 그럼 나는 자주 그에게 느끼는 무한한 사랑과 애정을 조금 야단스럽게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과 그를 존중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는 어린이를 귀엽게 대할 필요가 없고, 어린이는 사회가 만든 틀에만 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