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6월이 되면 하자 네트워크 학교에서는 고정희 추모기행을 떠납니다. 올해도 주말로드스꼴라, 로드스꼴라, 오디세이의 떠별, 길별들이 고정희와 세월호를 주제로 해남을 다녀왔습니다. '누군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사람이 남긴 발자취를 따라 일생을 들여다보면 문득 그가 가깝게 느껴지기 마련이지요.
6월의 논은 마음을 명랑하게 합니다 씩씩하게 자라는 어린 벼들은 떠별들과 닮았습니다 해남여행 이야기, 시작합니다.
해남여행
미황사에 가보았습니다. 뒤에는 달마산이 있고 앞으로는 남해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고요한 절에 앉아 바다로 사라지는 해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경치뿐인가요, 미황사는 종소리마저 아름답습니다. 미황사의 주지 금강스님에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밥도 주지, 재워주지, 이야기해주지"라서 자신이 주지라는 말부터 절은 절을 많이 해서 절이라는 말까지. 떠별들은 스님개그에 웃음꽃을 피웠습니다. 함께 108배도 해보았습니다. 머리를 바닥에 대고 손바닥을 귀 위로 들어 올립니다. 절은 자신을 낮추고 다른 이들을 존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힘들기도 했지만 하다 보니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아 좋았다는 떠별들이 있었습니다.
미황사에서 백일장을 했습니다. ‘이건 너에게만 하는 이야기인데...’ 라는 글감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써보았습니다. 할머니에게 쓰는 시, 자신이 탈모였다는 이야기, 강아지에게 쓰는 편지 등 재미있는 글이 나왔습니다. 그 중 주말로드스꼴라 떠별 ‘이말’이 쓴 글을 공유합니다.
까마귀 - 이말
나는 사실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었어.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 목소리를 내가 듣는 걸 부끄럽게 여기게 된 것 같아. 높임말과 반말 사이에서, 목소리가 점차 변해가는 시간 중에서, 그리고 나와 다른 사람 사이의 대화 속에서 헤매기도 하다가 점점 내 목소리가 줄어든 것 같아. 하지만 생각해보면 가끔은 큰 목소리가 필요할 때도 있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잘 전달하려면 아무래도 필요하겠지. 그래서 까마귀야, 목소리가 걸걸하지만 언제나 자신 있는 새야, 나도 가끔 네가 되어볼 수 있을까?'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 수행을 쌓고, 가난하지만 청렴한 삶을 살고, 마음과 정신을 하나로 모아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드리는 것. 고행 청빈 묵상. 이 단어들을 품고 평생 열한 권의 시집을 펴낸 시인이 있습니다. 고정희입니다. 떠별들은 고정희 생가에 갔습니다. 빛바랜 책들과 곳곳에 놓인 사진들, 책상 위에 펼쳐진 노트는 금방이라도 그가 활짝 웃으며 돌아올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책장 한 켠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예수상, 그는 신학자였습니다. 아마도 하루의 시작과 끝을 감사의 기도로 열고 닫았겠지요. ‘또 하나의 문화’라는 단체를 만나면서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을 열어갔습니다. 한국 사회에 깊이 자리한 가부장제를 꼬집는 시들, 여성의 시선이 담긴 시들을 발표하기 시작했지요. 무엇보다 그는 시인이었습니다. 군부 정권 시대를 살아갔던 그에게 광주 5.18 민주화운동은 큰 충격이자 아픔이었습니다. 민중과 시대에 대해 그는 깊이 고민하고, 기억하고, 마침내 시로 기록했습니다.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 시인의 일인가 봅니다.
고정희 묘소에서는 고정희 추모제를 열었습니다. 학교별로 준비해온 시와 노래, 춤을 발표했습니다. 주말로드스꼴라는 고정희의 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를 낭송했습니다. 떠별들은 하와이에서 온 알로나(Alona)와 쿠포노(Kupono)에게 훌라 ‘에훌리(E Huli)’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무덤을 둥글게 둘러선 채 우쿨렐레 소리에 맞추어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었지요. 닫기 모임을 하며 떠별들은 낯선 추모제였다고 말했습니다. ‘추모’ 하면 엄숙한 분위기를 떠올렸는데 춤추고 노래하는 추모제가 조금 신기하였습니다.
세월호 유가족분들은 4년 전 그날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동수 학생의 아버지께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도대체 세월호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떠별들은 유가족분들에게 엽서 한 장씩을 썼습니다. 엽서를 쓰는 것은 유가족분들에 대한 위로일 수도 있지만, 그 엽서 하나하나가 모여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는 운동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만약 고정희 시인이 지금 이 자리에 계셨다면, 지금의 쓸쓸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시 하나 쓰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미 그런 시를 쓰셨더군요.
언제부턴가 나는
따뜻한 세상 하나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무리 추운 거리에서 돌아와도, 거기
내 마음과 그대 마음 맞물려 넣으면
아름다운 모닥불로 타오르는 세상,
불 그림자 멀리멀리
얼음장을 녹이고 노여움을 녹이고
가시철망 담벼락을 와르르 녹여
부드러운 강물로 깊어지는 세상,
그런 세상에 살고 싶었습니다
그대 따뜻함에 내 쓸쓸함 기대거나
내 따뜻함에 그대 쓸쓸함 기대어
우리 삶의 둥지 따로 틀 필요 없다면
곤륜산 가는길이 멀지 않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내 피가 너무 따뜻하여
그대 쓸쓸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쓸쓸함과 내 따뜻함이
물과 기름으로 외롭습니다
내가 너무 쓸쓸하여
그대 따뜻함 보이지 않는 날은
그대 따뜻함과 내 쓸쓸함이
화산과 빙산으로 좌초합니다
오 진실로 원하고 원하옵기는
그대 가슴속에 든 화산과
내 가슴속에 든 빙산이 제풀에 만나
곤륜산 가는 길 트는 일입니다
한쪽으로 만장봉 계곡물 풀어
우거진 사랑 발 담그게 하고
한쪽으로 선연한 능선 좌우에
마가목 구엽초 오가피 다래눈
저너기 떡취 얼러지나물 함께
따뜻한 세상 한번 어우르는 일입니다
그게 뜻만으로 되질 않습니다
따뜻한 세상에 지금 사시는 분은
그 길을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쓸쓸함이 따뜻함에게, 고정희
해남에서는 수많은 여백을 마주했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무덤 뒤에 걸리는 여백, 세월호의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놓은 여백. 모든 사라진 것들을 마주하는 일이기에 어쩌면 쓸쓸하기도,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여백들은 하나의 탄생이라고 말합니다. 한 집에 노인이 사라지면 아기가 태어나듯이 그 여백을 채우는 무언가가 생기리라 믿어봅니다. 고정희가 걸어둔 여백은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했고, 세월호가 걸어둔 여백은 촛불로 밝혀졌습니다. 여백이란 무엇일지 곰곰이 들여다볼 일이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