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하나의 문화와의 인연으로 여름의 입구에 막 들어선 6월이면 해마다 고정희시인을 만나러 갑니다. 그 덕에 고정희의 시를 읽고 그의 집에 초대받는 행운을 얻었지요. 그곳에서 여전히 강렬하고, 여전히 젊고, 여전히 따뜻하고, 여전히 현재적인 고정희시인의 동료들과 가족, 풍경들을 마주할 수 있는 오롯한 시공간 속에서 우리는 고정희시인을 더듬으며 ‘기억’했습니다.
그가 남긴 문장들을 더듬어 읽으며 캄캄한 밤에 낭송회를 열고, 생가로 찾아가 그가 남긴 책상과 창문을 더듬어 만지며 그의 동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그를 기어코 더듬어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이 펼친 시극과 낭독무대를 감상하고,
바닥에 무릎대고 앉아 그가 던진 질문을 받아 더듬어 글을 쓰고 다른 동료들과 나눠읽고,
묘지 주변에 자란 소나무 등짝을 한참 더듬으며 고인과 인사를 나누며
고정희시인이 걸어놓은 풍경을 더듬어 만났습니다. 때로는 무섭고,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절망적이며, 때로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고정희를 말이죠. 이 곳에서 고정희시인의 오랜 동료들인 또하나의문화 동인들, 해남여성의 소리의 활동가들 ,하자네트워크학교 학생들 ,하자마을의 판돌들이 함께 고정희시인이 걸어놓은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기억의 풍경은 이렇게 ‘현장’을 더듬어가며 푸르게 떨렸습니다.
비켜서지 않고 우리로서 만나기 위해
세월호 이후 ‘기억한다’는 것의 질감이 바뀌어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기억한다’는 것이 제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시대-인의 고통의 현장에서 시작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팽목항에서, 구의역에서, 강남역에서 시작되고 있는 ‘기억들’도 그러합니다. 고정희시인을 ‘기억’한다는 것도 이미 25년 전 세상을 떠난 고정희시인을 동시대인으로서 불러들이는 일이기도 합니다. 또 그 현장에서 고정희시인을 만나 동시대의 일을 함께 기억하는 일이기도 하지요.
세월호 이후 고정희시인의 자리에서 만나 기억하고, 기도하고, 기록하며 동시대인으로서 동료를 만날 수 있기 위해 세월호유가족 자매형제들의 이야기를 초대하였습니다. 비켜서지 않고 ‘우리로서’ 만나기 위해 우리는 고정희시인과 그의 동료들로부터 얻어온 지혜와 용기를 빌려 <다시 봄이 올 거예요>를 학교별로 미리 읽고 밤늦도록 어떤 이야기로 우리가 응답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세월호세대’ 일 수 밖에 없다. 2년이나 지난 지금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더 적극적인 의미의 ‘세월호세대이고 싶다.”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 입장이라 불편하다. 그 불편함은...미안함과 무심함이 바탕일 텐데 가만 생각하면 이렇게 불편해 하는 우리들 곁에서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이 든다.” “미래에 다른 형식으로라도 세월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 세대가 직면했고 이제 우리가 바꿔나가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과거세대가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에 대해 싸우고 바꿔왔듯이. 그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에 들어온 문제에 대해서 싸운 것처럼 나도 우리에게 들어온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
그런 다음, 용기를 내어 무려 해남까지 세월호 이후 이야기를 4명의 세월호 자매형제들에게서 들었습니다. 더딘 세월호 인양과 파행으로 치닫는 특조위, 아직도 어두운 바다에 남아있는 미수습자들과 유가족대책위의 활동들, 죽음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근황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비통함, 밝혀지지 않은 원인과 밝혀내야만 하는 우리의 몫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어떻게, 응답, 할, 수, 있을지, 다짐, 과, 결심, 의, 말들을, 다졌습니다. 그리고, 비켜서지, 않기 위해, 우리로서,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아프게, 알아갔습니다.
시인을 기다리며
마지막 날 우리는 미황사에서 108배를 드리고 팽목항으로 갔습니다. 두 손을 꼭 가슴에 모았습니다. 뜬 눈을 꼭 감으며 시선을 캄캄함에 모았습니다. 걸음 하나하나에 풍경들을 모았습니다. 국가와 체제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을 모았습니다. 때로는 출렁이는 울컥함이 흘러나오기도 했습니다. 또 침통함을 가눌 길 없어 두 손을 꼭 쥐어보기도 했습니다. “이 해안의 깊은 골짜기를 서성이는/ 유랑의 무리들은 바다에 모조리/ 목 졸린 꿈을 쏟아 버리고/ 기름 다한 램프불을 꺼 내렸다/ 우리들의 바다는 서서히 미친다/ 설 곳 없는 혼의 무게로” (고정희, 부활 그 이후 中) 팽목항에 다 같이 섰습니다. 미친 바다에서 미치지 않기 위해, 간곡히 잊지 않기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다 같이 시를 한편 읽었습니다.
<탄생되는 시인을 위하여>
우리 서로 문 닫고 혼자인 밤에는 사는 것이 돌보다 무거운 짐 같고 끝내는 눈 덮인 설원(雪原) 하나 곤두서서 더운 내 부분을 지나갑니다 무사한 날을 골라 반기는 그대 우리는 정말 친구인가요? 우리는 정말 시인인가요? 캄캄한 어둠이 우리 덮는 밤에는 제 십자가 무거워 우는 소리 들리고 한 사람의 시인도 이 땅에는 없습니다.
“고정희 시인의 <탄생되는 시인을 위하여>의 시 구절들이 세월호 형제자매, 세월호 세대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다. 우리는 이제 서로 문을 열고 함께 시간을 보내려고 하고, 무사하지 않았던 날들에 대해서 생각하며 서로의 친구, 시인이 되려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자네트워크학교 학생의 말)
캄캄한 어둠 속에서 시인의 탄생을 고정희는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요. 우리 사는 시대에 새롭게 탄생하는 시인과 시민의 자리를 마련하는 추모기행의 시간에서 돌아온 지금에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합니다. “시인의 감각이 없이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내는 시민이 될 수 없다”는 말에 기대어 세월호세대의 문법으로 새롭게 ‘탄생’되는 시인의 자리에서 기억하고, 기록하고, 기도하고, 마침내 일어날지도 모르는 기적을 탄생될 수 있도록 우리가 2박 3일간 더듬었던 풍경들에 걸려있던 고정희시인의 질문을 다시 떠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