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작년 연말 야근을 하면서까지 열심히 기획해 놓은 프로그램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닥쳤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
한두 달이면 잠잠해질 줄 알았던 녀석이 한 지역을 중심으로 창궐하고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기존의 일머리 구조에서 벗어나 어떻게 일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우리도 분명 다르지 않았다. 지금껏 해본 적 없는 방식으로, 처음 접하는 플랫폼을 다뤄보고, 석학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는 누구인가, 또 여긴 어디인가. 자문자답하며 난감해하며 지내던 시기이기도 하다.
막연하지만 '뭐라도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생각과 '혼자서 손작업 할만한 것 없나..?'라는 생각을 불현듯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에서 '이메망' 프로젝트를 기획하게 되었다. (='이번 메이킹은 망했어'의 줄임말)
이메망 참가자 모집 포스터
자신의 집에서, 혼자, 만나지 않고, 모이지 않고, 작업을 마음대로 해보고, 망해보기도 하고, 누가 보지도 않으니 마음껏 실험해보는 경험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주된 컨셉이었다. 럭키박스마냥 무슨 재료가 갈지 공개하지도 않았다. 거기에서 오는 자연스러움과 자유로움, 혹은 재미가 분명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키트 구성은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 작년 영메이커 시즌 멤버들이 사다 놓았던 꽤 괜찮은 재료들과 재사용할 수 있는 소재를 선별하여 자르고 묶고 가공해서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이것들을 하나로 묶는 “물체주머니” 라는 컨셉으로 연결했다. 나에게는 익숙하지만 지금의 청소년에게는 처음 듣는 단어라 새로웠을 것이고, 판돌들끼리도 물체주머니를 아는 세대, 모르는 세대로 나뉘어 잠시동안이나마 시시덕거릴 수 있었다.
역할을 나눠 키트(물체주머니)를 하나하나 채우고 총 20개의 키트를 만들어 스무 명의 참가신청을 받아 우편으로 발송을 했다.
곧이어 참가 청소년 한 명 한 명의 인스타그램에 리뷰 글들이 올라왔고 #안망해서 미안 #나의 작품 이라 명명하며 자신의 작업을 작품의 경지로 소화해버리는 청소년부터 #티코스터 #조명 #오브제 등 하나의 단어로 자신의 작업을 소개하기도. #코로나가 나에게 수수깡을 가져다 주다니! #망해보라고 했지만 이것이 바로 작업의 시작을 알려주는 프로젝트 아니었을까 라며 뭉클한 소감을 적어내는 청소년들도 있었다.
공통적으로 청소년들의 회고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만족감’이었다. 뭐든 망쳐도 되니까 무엇인가로부터 해방감을 갖고 만들었고, 결과를 떠나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는 글들이 많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단순히 키트를 보내고 “작업해보세요~!” 가 아니라, “뭐든 시도하고 망쳐보라는 말”이 이 프로젝트의 키워드였음을 참가했던 청소년들이 다시금 해석해주었다.
우리가 처해진 환경이 안전하지 않으니, 안전망 속에서 작업을 해보는 경험들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기획을 하면서 또 하나 배운다. 좋은 기획은 타이밍이 반은 먹고 들어가는구나...
이메망은 3월 중순과 3월 말 2회에 걸쳐 진행했다. 총 40여명의 청소년, 청년들이 참여해주었고 인스타에 올라오는 결과물과 글들을 보며 나 역시도 자기만족감이 크게 들었던 기획이었다.
리뷰를 쓰는 이 시점에 구미가 당기는 글을 하나 보게 되어 발췌하며 글을 마무리 한다.
손수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무엇인가를 이루었을 때, 마음의 흡족감은 배가 된다.
다만 바야흐로 4차산업혁명 시대를 사는 우리는 생각보다 특별한 관심과 시간을 할애해야만 소확행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스마트 기기에 손가락 몇 번 쓱쓱 가져다 대면 필요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다음날 집 앞까지 배달해 주는 세상. 자동차는 자율주행 모드를 장착했고 인공지능은 삶 전반에 참견한다. 이런 지금, 당신과 나에게 ‘손으로 하는 일’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