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손님은 가수 ‘복태와 한군’으로 활동하는 음악가이자, 세 아이의 아빠인 한군이다. 하자마을주민이라면 하자의 마을행사에 와서 노래하는 뮤지션 복태와 한군을 한번쯤 만나봤을 것이다. 또 그는 뭇 사람들에겐 좋은 선생이자 동료로 혹은 특이한 청소년기 에피소드를 가진 사람으로 산하와 나무도 이미 몇 번 들었던 이름이었다. 마침 한군도 대학비진학 청년이었다. 한군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을까? 우리는 한군에게 연락을 했다.
그렇게 만나게 된 한군의 인생은 평범하지 않았다. 아주 평범하거나, 그렇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겠냐 싶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이 말에 수긍하게 될 것이다.
한군의 이야기
빠르게 지나가는 이야기
개척교회 활동을 하던 목회자인 아버지를 따라 ‘깡시골’에서 자란 그는 자연을 벗 삼아 음악에 흠뻑 젖어 헤드뱅잉을 하며 자라났다. 고등학교로 진학했던 푸른꿈학교 시절엔 대안학교의 안전망 속에 별의 별 ‘건전한’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녔다. 꾸준히 인생의 중심에 있었던 음악을 따라 상경한 뒤론 친구와 해방촌 빈집에 살며 라퍼커션에서 활동도 잠시, 하자센터 유자살롱에 취업을 했다. 하자에서 복태를 만나 <복태와 한군>을 결성, 뮤지션으로 길을 걷게 된다. 이게 스무 살의 이야기. 우리는 “왜 이렇게 빨라요?”라는 얘길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아직 그의 인생의 빅 이벤트는 오지도 않았다.
지금 나무와 산하의 나이인 21살에 복태와의 아이, 지음이가 생긴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부모님의 반대와 현실에 부딪히며 매서운 겨울 같은 시간을 견뎌낸 뒤 여러 도움을 받아 결혼식, 출산, 뮤지션으로 데뷔까지 척척 진행된다. 한군은 이렇게 표현한다.
“정말 폭풍 같은 일들을 치러 냈다. 독립과 만남과 연애와 사랑과 결혼과 출산과 이 모든 일이 2010년~ 2012년 초에 일어났다. 지금 삶의 세팅이 그 2년 반~3년 사이에 빵 하고 빅뱅처럼 폭발한 것 같다. 나도 복태도 엄청나게 괴로우면서 성장할 수 있었던 거다. 지금 생각하고 말하면서도 느끼는 건데 진짜 한파처럼 엄청난 추위가 들이닥치고 봄이 왔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집중포화를 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안정기를 찾기 위해서. 희로애락의 끝이었던 것 같다.”
폭풍 같은 10년을 지나보낸 지금, 한군은 지금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맨 처음, 자기소개를 부탁하자 한군은 이렇게 말했다. 음악으로 먹고살고 있고, 아빠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유자시절 한군
다른 거 안 하고 음악만 한지 10년이면 아르바이트나 다른 일은 안하고 정말 음악만 한 건가?
한군 아르바이트 해본 적이 없다. 그게 너무 감사하고 신기하고 지금 젊은 세대에게 좀 미안하기도 하고... 다 음악에 관련된 일을 하거나 음악을 했다. 안 하려고 마음먹고 아르바이트를 안 한건 아니고, 할 필요가 없이 계속 새로운 미션과 과제가 나타났다. 누군가 나타나 새롭게 던져주고, 새로운 채널들이 열렸다.
혹시 지난 시간동안 대학이 필요한 적은 없었나? 가고 싶었던 적이나?
한군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대학의 필요를 느낀 적이 거의 없다. 기타를 독학했고 음악을 배운 적이 없으니 테크닉이 더 풍성해지면 내가 하고자하는 표현을 윤택하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다. 근데 그러기 위해 대학을 가겠다가 아니라 기타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대학을 가서 음악을 배운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 대학을 안 갔기에 할 수 있는 풍성한 경험을 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무대에 서고 무대를 기획하고, 진행하고, 만들어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많은 공부를 급속도로 했다. 대학에서 결혼하는 법은 안 알려주지 않나. 애 키우는 법도 수업 어떻게 하는지도 안 알려주고.
내가 나 스스로 배우고 역량을 키워나가려 애쓴 것에 감사하다. 그렇지만 그럴 동력이 없고, 그럴 중력이 없는 친구라면 대학에 가야한다. 대학에 가서 교수가 개똥이더라도 좋은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것보다 네트워크를 넓힌다는 말이 지금 시대에는 더 정확한 것 같다. 강제적이라도 나를 낯선 곳에 던져두고, 낯선 사람들과 낯선 공간 안에서 살아남으려고 애쓰다보면 공부가 되고, 관계를 만들려고 애쓰다보면 친구가 생기고 동료가 생기고, 그러다보면 또 예측하지 못한 이벤트가 끊임없이 생기기 때문에 자기를 낯선 곳에 던져두는 건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대학을 가든 여행을 가든 둘 중 하나는 하라고 말하고 싶다. 대학을 가는 게 중요한건 아니고 낯선 곳에 자기를 던져주는 경험이 필요한 시대인 것 같다.
1/1
Loading images...
육아와 일
나무 내겐 9살 동생이 있다. 이름은 동글이. 부모님이 바쁘셔서 올해 특히 같이 있는 시간이 늘었다. 동글이와 지내면서 이 전에는 해보지 못한 고민을 하게 됐다. 가끔 나도 모르게 불쑥 화가 날 때, 웃어넘길 수 있는 일에 짜증을 내게 되고 마음을 곱게 쓸 수 없을 거 같아 차라리 입을 다물게 되는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동글이의 형제지만 또 다른 보호자이기도 하다. 내 역할은 어디까지이고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동글이에게 어떤 모범, 울타리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한다. 내 활동을 하면서도 동글이와 같이 배우고 놀 수 있을까? 한군은 세 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들을 돌보면서 한편으로 지치고 가끔은 불쑥 화가 나기도 할 거 같다. 그럴 때 한군은 어떻게 화를 다스렸는지 궁금하다.
한군 어제도 다스렸다. 지금도 하고 있고. 어제도 복태가 일이 있어서 애를 셋 봤다. 넷이서 있으면 좋지만 두려움도 있다. 애기 셋이서 얘도 자기 이야기 들어달라고 하고 얘도 자기이야기, 얘도 자기 얘기. 얘 이야기 듣고 있으면 다른 애가 바지에 쉬해가지고 바지 벗기고 씻겨야하고 바닥 닦고 빨래해야하고 그 사이에 아빠 이것 좀 봐봐 하고 있고 그 사이 얘는 뭘 쏟았고 그러면 하루 종일 앉아있을 틈이 없다.
너무 지쳐서 간신히 쉬고 있으면 밤에 셋째가 깨서 울며 불며... 도대체 내 시간은 어디 있는 거야! 할 때 쯤 복태가 바통터치 해서 밸런스를 맞춰가고 있다…(깊은 한숨)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내 업보, 내가 해결해야할 미션이고 과제이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이고 책임져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힘들다. 내가 부서지고 내가 갈아 없어지는 기분이 드는데 그 시간은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은 점점 더 성장해가고 있고 희망이 있다. 얘들은 점점 더 커가고 곧 나를 떠난다. 그걸 아니까 힘들어도 최대한 그 순간에 있으려 힘쓴다. 그래도 요즘 힘드니까 TV도 틀어준다. 가서 TV 좀 봐 하면서.
육아와 음악작업의 병행이 어떻게 가능했나?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면 듣고 싶다.
한군 일단 복태와 한군의 음악작업만 보면 일단 아이들이 깨어서 같이 놀 때 기타를 꺼낼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타가 아빠의 품을 차지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가 가서 안겨있어야 할 자리인데 기타가 있으니까. 집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곡 한 두세곡 치고, 쟁반이나 그릇을 젓가락으로 두드리며 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음악교육이 일어나는 것 같다. 사실 아이들 위주의 연주를 집에서 하고 복태와 한군의 작곡 작업은 아이들 재우고 11시 이후에 하기 때문에 복태와 한군 음악이 잔잔할 수밖에 없다. 굉장히 잔잔하고, 음역도 낮고, 느리고, 조용한 음악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나에게 사운드 작업이나 음악작곡 의뢰 같은 게 들어오면 그런 작업들도 아이들이 있어서 악기를 직접 연주할 수 없다. 그래서 컴퓨터 미디음악으로 많이 만들어야 해서 공부를 했다. 왜냐하면 큰 소리가 나면 안 되고, 헤드폰으로 밤에 혼자 해결할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야하니까. 전자음악이나 미디음악을 다룰 수 있는 스킬이 육아 덕분에 스스로 터득하는 동기가 됐다. 그렇지만 음악을 크게 들으면서 작업하는 건 또 다른 영역인 것 같다. 큰 소리로 연주하고 큰 소리로 합주해서 만드는 음악은 에너지가 굉장히 크고 다르기 때문에 큰 소리로 쿵쾅쿵쾅 음악작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있다. 밴드도 해보고 싶고, 그렇지만 지금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마음 한 구석에 고이 접어서 간직하는 중이다.
복태와 한군은 있는 그대로의 삶을 노래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받은 영감들이 많다. 육아가 음악활동에 굉장한 제약을 주고 있지만 그 제약만큼 제약 안에서 할 수 있고, 가능한 음악이 있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 긍정적으로 보고, 긍정적으로 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사실 복태와 내가 살아내고 버텨갈 수 있는 건 힘든 상황이 있더라도 어떻게 그 상황을 뒤집어서 생각하느냐, 어떻게 최대한 나쁜 상황도 우리에게 이로운 걸로 생각을 마음가짐을 태도를, 그게 복태와 한군이 음악을 하면서 아이를 키우면서 10년간 먹고살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다. 어떻게 생각을 전환시켜서 삶에 적용하는지가 중요한 포인트다.
복태와 한군
산하 나는 지금 부모님의 지원 없이 살기가 힘들다. 한군도 육아비용에 월세, 생활비가 만만찮을 텐데 경제적인 독립이 어떻게 가능했나?
한군 경제는 사실 복태가 책임지고 있어서 디테일하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말할 수 있는 선에서 어떻게 먹고사는지 이야기하면, 우선 비수기 성수기가 있다. 수업도 공연도. 1,2,3,4월은 보릿고개다. 5,6,7달과 방학기간 그리고 무더운 여름하면 8월 비수기. 9,10,11,12까지 수업과 공연이 성수기다. 그러면 이 하반기에 내년 초를 버틸 돈을 모아야 한다. 무조건 모으고 저축하고 아끼기도 해야 한다. 이 아낌이 커피한잔도 못 사먹을 정도는 아니고, 먹고 싶은 건 먹고 필요한 건 살 수 있을 여력이 된다.
올 해로 설명해보자면 일이 들어오고, 지원 사업을 넣어서 올해를 세팅 한다. 지원사업에서 나오는 활동비를 복태와 나 둘이하면 어느 정도 킵 된다. 거기에 예술치유지원사업에 또 넣었는데 이것도 지원비가 나온다. 그렇게 기본 생활비가 셋업이 되고, 외의 수업과 공연이 있다. 수업을 3개 이상하고 공연도 많게는 일주일에 한번 적게는 2주일에 한번이라 쳤을 때 한 공연에 30만원, 크게 받으면 80만원, 한 달에 두세 개 있으면 생활비가 모인다. 여기서 남은 건 저축을 하고, 제일 중요한 건 이렇게 모아서 반드시 여행에 간다. 12월 말에 한국을 떠나서 1월이나 2월에 돌아오는 스케줄로 더운 나라로 간다. 돈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라 비수기 때 1,2월에 한국에 있으면 우울해진다. 애들 방학이고 집에서 추운데 애들 데리고 다섯 식구가 집에 있으면 힘들다. 3년 전부터 매해 겨울에 떠나왔는데 육아에도 너무 좋다. 나가서 햇빛의 기운을 받고 한국에 와서 학교 다니고 어린이집 다니면 애들이 에너지가 다르다. 그걸 위해 여행을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비수기와 성수기를 오가고, 보릿고개를 간신히 주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아낄 거 아끼면서 9년간 살아 왔다. 그럼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는 항상 불안과 싸워야했다. 내년에 일이 안 들어오면 어떡하지 했는데 우리가 이 정도 했고, 사람들과 어우러져 지냈으니 내년도 아마 어려운 시기가 있겠지만 이렇게 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산하10년이라는 활동기간이 어떻게 보면 이제부터 앞으로는 괜찮을 거라는 안전함을 만들어준 거 같다.
한군 근데 그 믿음은 항상 있었다.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지 않나. 들판의 백합꽃도, 짐승들도 먹여 살리는 하느님인데 설사 너희들이랴, 라는. '너희들이랴'가 중요하다. 어떤 신이 됐던 간에 큰 에너지의 존재들이 우리를 돕지 않겠느냐는 믿음이 있다. 우리는 절에도 교회에도 성당도 가지 않지만 간절한 믿음과 희망과 꺼지지 않는 불꽃이 있기 때문에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열을 받을 수 있겠고, 사람을 만나니까 층이 생기고 그 층이 생기니 이 위에서 우리가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이 밑의 믿음. 그래도 굶어죽기야 하겠어? 하는 믿음이 은은하게 불을 지피고 달구고 있으니 이 에너지로 살아왔고 살아오니 나쁘지 않고 행복하고, 아이도 잘 크고 있다. 어떻게 먹고살아? 하고 물어보면 다 설명해 줄 수는 있는데 말하고도 애매하다. '매 순간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이게 현실적으로 이야기해줄 수 있는 한계인 것 같다.
복태와 한군 음원 자켓 사진 중
오랫동안 요가를 하고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하게 됐고, 요가로 무슨 일을 하고 있나?
한군 나는 기독교, 종교와 영성, 신앙이라는 키워드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났고 그런 것들이 익숙했다. 신에 대한 거, 다른 세상이 있고 다른 어마어마한 존재가 있다는 거. 그게 어떤 에너지의 형태든, 다양한 신이든. 그런 것들에 흥미가 있었다. 그러다가 2010년도에 복태를 만났다. 복태가 로드스꼴라 친구들과 요가수업을 했다. 자연스럽게 복태 통해서 시원요가(라자요가의 집)를 알게 되었다. 시원을 통해서 요가에 대해서 깊이 있게 배우게 됐다. 근데 아이를 키우다 보니까 꾸준히는 가지 못했지만 2010년부터 지금까지 발가락 하나 걸치고 알음알음 하고 있다.
단순히 스포츠로서의 스트레칭, 다이어트 등은 사실 요가의 다가 아니다. 요가라는 커다란 숲의 풀 한포기 정도 인거지. 요가는 삶의 철학이고, 지혜고, 삶 속에서 끊임없이 갈고 닦는 태도를 말하는 것 같다. 지금 매일 동작을 하거나 그러진 못하지만, 나는 카르마 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카르마 요가는 자신한테 주어진 자신의 삶을 묵묵하게 담담하게 충분하게 받아들이면서 기꺼이 헌신하며 살아가는 삶, 그런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육아하는 것도 굉장히 충실히 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수업에서 청소년들을 만나면서도 이들에게 집중하고 이 아이들과 좋은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요가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넓은 의미에서.
올해 초에 인도에 다녀왔다. 거기서 보이스 요가 라는 걸 알았다. 타인과의 소통의 목적을 가지고 사용하는 게 보통 음성이고 목소리인데. 목소리로 자신을 돌볼 수도 있고, 요가 동작을 하듯이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책을 읽고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보이스 요가에 대해 조금 더 공부를 했다. 그래서 목소리가 가진 치유력. 나를 위해서 노래하고, 나를 위해서 소리 내는 치유력이 얼마나 대단하고 마사지 효과가 있는지. 실제로 과학적으로 큰 효과가 있다는 게 증명된 책들을 보며 공부했다. 복태와 한군이 원래 치유적인 음악들을 하고 있으니까. 자연스럽게 목소리를 활용해서 이완하는 워크숍 자기 소리를 내면서 자기를 마사지하고 감정을 정리하는 워크숍을 만들게 됐다. 요가적인 삶을 살고 보이스 요가든 삶의 요가든 이로움을 전하려고 하고 있다. 삶의 큰 키워드라는 건 확실한 거 같다.
1/1
Loading images...
한군의 10년
비대학, 어린 나이에 아빠라는 사실에 대해 사회의 편견어린 시선이 많았을 것 같다. 이런 편견 때문에 부당한 경험이 있었나? 없었다면 이 편견에 대한 한군의 생각이 궁금하다.
한군 비대학에, 군대도 안 갔고, 여러모로 대한민국의 보편적 남성의 길을 진작 벗어났다. 근데 발을 담그고 몸을 담근 토양이 하자센터였고, 하자에서 한군이라는 씨앗이 시작됐고, 줄기가 나고 잎이 펴서 보편적인 사회적 시선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대단하다, 용감하다, 응원한다는 격려와 지지를 받아서 부당하고 억울한 경험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근데 재미있는 게 이제 스물 아홉인데, 주변에 다른 사람이 이제 갓 20대 초반이 됐는데 애기가 생겨서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걱정된다. 나도 그랬지만 이제 갓 20살이 된 엄마아빠들을 보면 좀 잘 안 좋게 마무리가 된 경우를 많이 봐서 안타깝다. 기승전 복태일 수 있는데 복태가 나보다 삶의 경험치가 8년이나 앞서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커플은 편견과 그런 시선을 이겨낼 수 있었다. 내면의 힘이 있었다고 할까? 중요한 건 내면의 힘이다. 내가 이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갓 스무 살이 됐는데 원래 하고 싶은 음악도 작업도 친구만나는 것도 포기하고 이제 육아의 길을 걸어야하니 난 망했어! 가 아니라 이게 내 20대에 주어진 최선의, 최고의 미션이고, 업보이고, 과제이고 돌파해 나가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음이가 처음 생기고 결혼을 하면서 ‘내 청춘은 육아에 바친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버티고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왠지 부당한 게 있어야할 것 같은데 애초에 프리랜서 뮤지션 강사로 활동을 해서 이력에 의해서 제약을 받거나 하지 못한 일은 없었다. 운이 너무 좋은 케이스라 생각하고, 감사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 한군으로서 일을 가고 수업을 갈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평가받거나 편견어린 시선 받을 필요가 없는 삶이었다. 나는 20대 때부터 자존감 강하게 살아왔고, 강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견딜 수 있으니까. 당연히 중간 중간 살면서 무너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편견 탓 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무너지는 경험들이 좀 있었던 것 같다. 보편적인 남성의 길을 걸은 사람이 멋있어 보일 때, 내가 하지 못하는 걸 할 때, 그럴 때. 지레 아빠라면 운전하고 가족을 태우고, 장을 보러 가는 직장에 다니는 그런 보편적인 아빠의 상이 있지 않나. 그런 상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가 티비나 영화에서 본 아빠다운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자격지심이 많았다. 월급을 받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을까? 물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지만 그런 혼자만의 괴로움 같은 거에 빠져있는 시기도 있었다.
내가 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도전하고 싶은, 위축되는 경험들을 개인적으로 한 번은 하는 것 같다. 그런 것 말고는 일찍 아이를 가져서, 일찍 아빠가 돼서, 대학을 안 가서 특별히 큰 문제는 없다. 오히려 더 좋은 게 20대를 육아를 하고 20대 때 고등학교 때 축적한 에너지로 수업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인프라를 쌓고 네트워크를 구축하면서 곧 30대가 되는데 하고 싶은 게 명확해졌다. 20대의 경험을 통해서 30대에 진짜 배우고 싶은 거, 진짜 내 삶에 필요하고 이걸 공부했을 때 단순 지식이 아니라 내 삶에서 지혜로 발현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드는 영역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굉장히 크게 찾아오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20대 때 막무가내로 대학 가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치를 쌓고 나서, 나에 대한 탐구와 발견이 있고난 후에 대학을 선택하는 게 훨씬 좋은 케이스라는 걸 살면서 경험하고 느꼈다. 나는 내년부터 공부하고 싶은 게 생겼다. 나는 나의 삶의 서클에 굉장히 만족한다.
산하한군에게 일이나 돌봄은 사실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미 주어졌기 때문에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어서 홍조와는 전혀 다른 경험을 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한군 맞다. 사실 나한테는 계속 주어졌다. 끊임없이. 지음이도 갑자기 생겼고, 내가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는 삶이 계속 펼쳐진 거다. 그래서 사실 주체적으로 내가 기획했다기 보단 하늘에서 점지해줬다. 지구에서 계속 일을 주니까 계속 받아들이면서 해나가고 거기서 배움이 있고, 내 안에서 이걸 더 공부해야겠다는 것이 생겼다. 서른이 되니까 나도 내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게 조금씩 올라온다.
2016년도 까지 굉장히 활발하게 공연을 했지만 사실 삶의 90%는 육아다. 그래서 창작할 시간이 없었다. 복태와 한군으로 정규앨범을 낸달지 뮤지션 기타리스트로서 내 개인작업을 하는 여력이나 시간이 없다. 그래서 내 작업을 해야 하고 내 메시지를 보내야한다는 고민은 있다. 복태와 한군 작업을 정규앨범을 위해 고군분투를 하고 있고, 아이들을 열심히 키우면서 아이들이 어린이집을 가고 학교를 가면서 시간이 좀 생기고 그런 틈바구니 속에서 개인 작업을 해보려 애쓰고 있다. 삶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조직하고 살아가고 있는 거다.
2017년도부터는 복태와 한군이 앨범을 내지 않고 보여 지는 활동이 적어지니까 우리는 찾는 사람들이 점점 줄더라. 새로운 뮤지션도 계속 나타나고, 우리가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으니까. 놀랬다, 많이. 영원할 줄 알았던 한 때가 저물고 이제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 걸 깨닫고 충격은 좀 받았지만 당연한 거니까. 복태와 한군 2.0으로서 새로운 버전으로 가야하는데 우리는 어떤 버전으로 갈 것이냐 했을 때 다른 전환을 맞이해야했다. 조금 더 치유로서의 위로로서의 음악작업을 해보자고 하고 있다. 내년이면 복태와 한군도 10주기가 되고, 나도 수업을 하고 이 하자동네에서 뭔가를 계속 펼쳐 나간 지 10년이 딱 된다. 내년에는 수업을 안 할 계획이다. 휴지기와 공부기간을 가져야겠다는 계획이다. 그런 와중에 인터뷰를 연말에 하게 돼서, 되게 좋다.
1/1
Loading images...
육아의 무게
산하 참 신기한 게, 홍조도 대안 교육 판에서 활동한지 10년째고, 복태와 한군도 10주년 딱 된다고 하니까 우리가 참 이 프로젝트를 타이밍 알맞게 잘 계획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군 불타던 10대, 지성인으로서의 발돋움했던 20대를 지나 30대는 어떤 일들이 펼쳐질까 기대가 된다. 40대가 됐을 때 10년을 뒤돌아보며 인터뷰하게 된다면 어떨까 생각도 든다.
요즘은 어떤가? 잘 지내고 있나?
한군 매일 매일이 극도로 보람돼서 더 이상 보람되면 위험하다, 더 이상 보람차면 폭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살고 있다. 너무 바쁘다. 일 3개를 하고 집에 돌아가면 11시 반, 12시인데 그러고 나면 또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한다. 작업이 풍년이다.
다행이 돈이 되는 작업들이고. 또 억지로 하는 작업이 아니라 너무 보람차고 행복한 작업들이다. 정말 내가 바라고 좋아할 수 있는 일로 작업이 풍년인 건 정말 좋은 삶이다. 너무 힘들지만, 정말 말도 못하게 바쁘다. 진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보람되고 바빠서. 근데 끝나고 집에 오면 아 나 왜 이렇게 힘들까. 그러지 않고 오늘 보람돼서 미쳐버리겠다. 이런 소리가 나온다. 더 이상 행복하면 큰 일 날 거 같다.
이제 내년에는 내가 서른이 되고, 또 9년간 정말 아낌없이 제가 가지 에너지들을 청소년 수업을 하면서 나눠주며 에너지를 많이 썼다. 그래서 서른이 되는 내년에는 나한테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 안식년이다. 내년에는 최대한 무중력한 상태에 놔둬보려한다. 아무 것도 안한다는 게 좀 두렵기도 하고. 걱정도 되지만, 또 뭔가 익사이팅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올해 열심히 내년에 아무것도 안하려고 한 육개월 정도는 저축을 하고 있다. 복태랑 같이. 버틸 계획이다.
주변에서는 한군 저렇게 말해도 분명히 수업한다는데 한 표 건다고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안하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드디어 9년 만에 뭘 배우기 시작했다. 올해 12월에 시타르라는 인도의 기타 같은 그런 악기 공부를 시작했다. 선생님을 두고 일주일에 한 번씩, 지금 세 번째 수업을 갔다 왔다. 내가 못하는 걸 잘 할 수 있게끔 한 스텝씩 가는 게 즐겁고 뭔가를 배운다는 감각을 느끼고 있는 요즘이다. 내년엔 인도 음악 공부도 열심히 하고, 개인 음악 작업물도 만들고, 복태와 한군 음원도 좀 정리해서 만들고, 그럴 거 같다. 그래도 바쁠 거 같다. 희망찬 내년이 되리라 생각하고, 내년도 행복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살다가 만나면 좋겠다.
복태와 한군, 지음이 이음이 보음이
마음가짐. 한군의 이야기 중 핵심을 꼽으라면 난 이 단어를 고르겠다. 한군의 마음가짐은 단단하다. 얼마나 부스러지고 다시 뭉치기를 반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한군은 꼭 해안가에 있는 바위 같다. 아무리 파도가 몰아쳐도 그 자리, 그 모습을 유지하는. 동시에 폭풍우가 지나간 뒤의 잔잔한 햇살 같기도 하다.
자기 계발서 10권을 읽는 것보다 누군가의 생애를 한번 듣는 게 훨씬 낫다고 하더라니, 한군의 인생을 듣고 나니까 저절로 마음이 겸허해졌다. 현재를 받아들이고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마음가짐을 달리 먹는 것, 놀이처럼 여행처럼 즐겁게 해보는 것 ’잘 살기 위해선‘ 실은 이게 기본인 걸 잊고 있었다.
나의 20대를 육아에 바치겠노라 하는 선언이 인상에 남은 건 그 선언을 스스로 하는 사람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이면 더 그렇다. 육아는 한군의 표현대로 ’내가 갈려 없어지는‘ 것이기도 한데, 그 가치가 많이들 평가절하 된다. 아이는 알아서 자라는 게 아니라 돌봄 아래서 자란다. 한군은 20대를 보내며 그 가치를 잘 아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러니, 나도 어차피 이 팍팍한 세상에서 살아가야 할 거라면 잘 살아보기로 선언해보기로 했다. 그럼 10년 뒤쯤, 나도 달라져있으리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