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안 개구리라고 했나요. 맞아요. 제가 바로 그 우물 안 개구리였던 거예요. 그런데 그거 아세요? 우물 안 개구리는 자신이 답답한 줄도 모른대요. 우물 안에서 몇 년을 살던 개구리는, 어느 날 문득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밖엔 뭐가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는데도 말이에요. 심지어 뱀보다 훨씬 더 무서운 괴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도 말이죠. 참 어리석기 짝이 없어요. 그죠?”
내 나이 18살, 자퇴를 했다. 따뜻한 공기가 감도는 4월이었다. 평일 오전, 학교 후문 앞을 지났지만 그곳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더 이상 내가 소속되어 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짜릿했다. 자퇴를 하지 않았다면 저 안에서 샤프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것이었다. 기분이 째졌다. 아주그냥 째지게 좋았다. 그길로 엄마와 엄마의 친한 지인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그분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까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길을 택한 내게 해줄 수 있는 얘기는 꽤나 많았을 테니까. 하지만 걱정을 했던 게 무색할 만큼 점심은 아주 맛있었고, 그날 나는 아낌없는 칭찬을 받았다. 자퇴하고 칭찬을 받다니. 내 주변 어른들도 제정신은 아니신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 나이 19살, 로드스꼴라에 입학했다. 다시, 4월이었다. 노트북 화면에 떠별과 길별의 얼굴들이 둥둥 떠다녔다. 우리는 ‘Zoom’이라는 화상통화 어플을 통해 처음 만났다. 오프라인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던 그 시절, 우리는 어색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첫인사를 해야 했다. 나는 분명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었고, 모두의 얼굴이 한눈에 보이는 상황에서 나 혼자 음소거를 풀고 목소리를 내는 것은 굉장히 낯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렇게 온라인 수업에 익숙해질 때쯤, 서서히 학교에 직접 등교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 떠별들을 만났을 때, 특히 오리엔테이션에서도 보지 못한 10기 떠별들을 만났을 땐 연예인을 보는 느낌이었다. 오프라인 수업으로 전환됨과 동시에 수업의 내용도 조금씩 달라졌다. 바느질, 책읽기 수업처럼 온라인에서 할 수 없었던 수업이 시작되었고 글쓰기 시간에는 글을 프린트해서 오기 시작했다. 가장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연 ‘소통’이었다. 우리 사이에 ‘벽’이 없어지고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 온라인 수업에서는 수업이 끝나면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회의 나가기’ 버튼을 눌렀지만, 오프라인 수업에서 ‘회의 나가기’ 버튼 같은 건 누를 수 없었다. 온라인 수업에서는 할 말이 끝나면 곧바로 음소거 버튼을 눌렀지만, 오프라인 수업에서는 우리의 몸에서 날 수 있는 온갖 잡소리들을 그대로 노출해야 했다. 우리가 함께 있는 공간에 ‘비디오 끄기’ 기능 같은 건 없었고, 검은 화면에 떠있는 하얀 글씨 대신 눈을 감고 있을지라도 그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침은 먹었는지, 어제는 몇 시에 잤는지, 과제는 다 했는지 물을 수 있는 여지가 생겼고, 미쯔와 젤리를 나눠먹으며 고맙다고 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겼다. 길별이 오시기 전, 수업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수다를 떨며 비효율적인 시간을 즐길 수도, 함께 소리 내어 웃을 수도 있었다.
“우물을 빠져나온 개구리 앞에 펼쳐진 세상은 생각보다 훨씬 근사했어요. 따뜻한 햇볕이 비치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지요. 뱀이나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은 없었고, 개구리는 난생 처음으로 꽃향기도 맡아봤어요.”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학교생활이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말 좋았다. 사실 여행이 자꾸 취소될 때만 해도 ‘여행을 못가는 여행학교’에 다니는 것이 ‘정말 좋다’고 말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이곳은 꿈에도 몰랐던 일들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일어나는 곳이었다.
“채식 도시락을 원하는 떠별이 있나요?”
“계란은 빼고 주세요.”
“텀블러에 담아주세요.”
“다음에는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라는 책을 읽어오면 됩니다.”
“밖에서 만났으면 내가 너한테 언니라고 불러야 돼.”
이곳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거의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문장들이, 이곳에서는 일상의 문장들이었다. 휴지를 아끼는 사람에게는 이유를 묻지 않으면서 채식을 하는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하게 커다래진 눈으로 그 이유를 묻고, 텀블러는 귀찮으니 챙기지 않고, 상대방의 성적지향을 내 마음대로 결정해버리고, 나이를 나눠 분류해버리는 내 일상은 저 문장들로 인해 완전히 바뀌었다. 그렇게 나는 삼겹살을 먹으며 공장식 축산을 까대는 인간에서 유연한 채식을 하는 인간이 되었고, 지갑을 챙기는 것은 귀찮아하지 않으면서 텀블러를 챙기는 것은 귀찮아하는 것에 대한 아이러니함에 대해 알게 되었고, 남의 성적지향은 내가 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잠시 동안의 고뇌를 거쳐야만 내 앞에 있는 친구의 나이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로 인해 나의 호흡은 조금 더 시원해지고 시야는 조금 더 트여졌다.
“제가 아까 뱀이 없었다고 했나요?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도요? 맞아요. 뱀은 없었어요. 그보다 더 무서운 괴물도 없었죠. 그래요. 그런데 말이죠….”
호흡이 시원해지고 시야가 트여지자 전에는 볼 수도 없었고, 볼 기회조차 없었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전, 텃밭수업에서 김장을 했다. 우리는 당연히 ‘김치’를 담갔고, 몇몇 ‘유난한’ 떠별들은 그에서 벗어난 ‘채식김치’를 담갔다. ‘김치’를 담그는 나를 포함한 떠별들에게는 하하의 친절한 설명과 재료가 당연하게 주어졌고, ‘채식김치’를 담그는 떠별들에게는 둘 중 어느 것도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은 재료부터 레시피까지 모든 것을 본인들이 직접 찾아봐야 했고, 구석으로 밀려나 무관심 속에서 김장을 해야했다.
내가 일반학교를 다니던 시절, 아이러니하게도 ‘일반학교’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대안학교가 ‘대안학교’일 뿐, 일반학교는 그저 ‘학교’였다. 그곳은 ‘일반’이고 이곳은 ‘대안’인 것도 짜증나 죽겠는데, 우리의 학교에는 꼭 ‘대안’을 붙이면서, 자신들의 학교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일반’이라는 말도 빼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제부터 나도 한 가지만 하기로 했다. ‘액젓’, ‘채식’ 둘 다 빼버리든지, 그럴 수 없다면 둘 다 붙이든지. 하지만 그 둘의 대우가 달라질 때는 그 둘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냥 다니면 편한 일반학교를 굳이 나와서, 혹은 아예 들어가지 않고 대안학교에 다니는 ‘유난한’ 우리가 모여 김장을 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일반적인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떠별들은 액젓김치를 만들었고, 그 유난한 중에서도 조금 더 ‘유난한’ 몇몇 떠별들은 편한 길을 놔두고 굳이 채식김치를 만들었다. 나는 대안학교를 들어온 부분에 있어서는 유난하지만, 액젓김치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그나마 일반적이기 때문에 채식김치를 만든 떠별들보다는 덜 유난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는 무슨. 일반학교와 액젓김치, 대안학교와 채식김치는 지금까지 말해왔던 것처럼 어딘가 닮아있다. 대안학교에서 대안학교가 느끼는 서러움을 채식김치를 담갔던 떠별들에게 고스란히 느끼게 하는 것이 무언가 아이러니했다.
“그래요. 우물 밖을 나왔다고 해서 항상 좋은 일만 있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당연히 힘든 일도 생기겠죠. 뱀이나 괴물을 안 만난 게 어디에요. 그리고 어찌됐든 저는 우물 안에 다시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요. 지금의 공기가 너무 좋거든요.”
항상 생각하는 것이지만 나는 인복이 좋다. 내 곁에는 놀라울 정도로 항상 좋은 사람들 밖에 없었다. 길게 늘일 필요 없겠다. 그렇다. 바로 당신 얘기다. ‘혹시 나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고 있는 당신. 맞다. 바로 당신을 두고 하는 소리란 말이다. 그럼, 여기까지.
“아, 참. 한 가지만 더 말하자면, 좋은 공기는 좋은 사람이 만들 수 있대요.”
둘,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지
“길을 잃었다 어딜 가야 할까
열두 개로 갈린 조각난 골목길
어딜 가면 너를 다시 만날까
운명으로 친다면 내 운명을 고르자면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르지”
- 아이유 ‘분홍신’ 중
나는 아이유처럼 분홍신을 신은 건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있다. 맞는 길을 고를 자신. 어쩌면 어떤 길도 맞는 길로 만들어버릴 자신이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둘의 차이점은 갈수록 모호해지고, 결국 나는 그럴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를 수밖에 없는 운명 말이다. 길을 잃었다는 말은 길을 걷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 아닐까. 우리는 모두 길을 잃는 동시에 길을 걷고 있으니까. 열두 개로 갈린 조각난 골목길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어디론가는 이어져있을 것이고, 그 길 끝에 꼭 ‘너’가 있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너’보다 더욱 멋있고 화려한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눈을 감고 걸어도 맞는 길을 고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