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12일, 여성 아이돌 음악 경쟁 프로그램 <퀸덤>에서 AOA가 아주 놀라운 무대를 선보였다.
아이돌은 본디 우상이라는 뜻이다. 여러 아이돌 그룹이 나와 세계를 흔들고, 무수한 팬들을 만들어 케이팝 문화를 이끌어갈 동안 나는 그것을 고스란히 지켜보며 성장해왔다. 나는 열성적인 케이팝 팬은 아니었으나, 뒤처지는 아이처럼 보이기 싫어서 좋아하는 아이돌로 얘기할 수 있을 만한 그룹 이름을 몇 개 정도 외우고 다녔다.
내가 6학년이었던 2010년에는, 근육을 내세우는 ‘짐승돌’ 컨셉의 남자 아이돌이 많았다. 나는 그들의 울퉁불퉁한 몸과 부담스러운 눈빛을 좋아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자가 여자 아이돌을 좋아하면 이상하게 보는 분위기가 있었다. 나는 남자에 관심이 많은 척, 그들이 가사에서 거칠게 여성을 다루고 비웃어도 그것이 설렌다며 진심이 아닌 말들을 내뱉었다. 사실 그런 순간에도 내 눈은 여자 아이돌에게 가있었다. 예쁘고 섹시하며 언제든 애교부릴 준비가 되어있는 여자 아이돌 말이다.
그때는 살아있는 인형 같은 여자 아이돌이 신기했다. 어떻게 저들은 저렇게 마르고 아름다울까? 울룩불룩 한 남자 아이돌과 달리 하얗고 깨끗해 보이는 여자 아이돌이 좋았다. 중학생이 되니 여자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말해도 괜찮아져서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자 아이돌이 좋아!"
노래방에 가면 2시간 내내 여자 아이돌 노래만 주구장창 불렀다. 씨스타, 걸스데이, 에이핑크 등 다양한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며 그들과 함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신나게 몸을 흔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래에는 뭔가 특이한 점이 있었다. 거칠지만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고 세상을 구할 것이라 노래했던 남자 아이돌과 달리 여자 아이돌의 노래와 퍼포먼스는 주로 예쁘게 치장하고 가만히 누군가 다가와 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래 속 '누군가'는 보통 남자였고, 오빠였으며, 그들에게는 그와의 사랑이 유일한 목표인 듯했다.
어느 여자 아이돌은 '나는 남자는 없이 잘 살아, 나만을 위한 삶을 살거야.’ 라고 노래했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화장하고 머리를 자르는 것’ 이었다. 지금은 불편한 이 모든 게 당시에는 정답 같아서, 어른이 되면 그들처럼 가사 속 멋진 '오빠'를 만나 사랑받을 수 있을까 고민했다. 펑퍼짐한 교복을 입고 학원을 열심히 다니던 중학생은 그들의 인형 같은 몸매가, 투명한 피부가, 준비된 애교가 부러웠다.
TV에는 지독하게 똑같은 모습으로 강요된 여성들이 나오고, 길거리에는 여학생들을 위한 다이어트 전단지가 날아다니며, 저렴한 로드숍 화장품은 거리에서 핑크빛을 뽐내며 꾸밈을 유혹하는 시절이었다. ‘예쁜 여성'을 위해 준비된 꾸밈의 계단 이 펼쳐져 있었고 내가 다른 친구들과 함께 그 계단을 밟아 올라가고 있을 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학생들을 보았다. 여학생들이 미디어가 보여주는 여성의 모습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동안 남학생들은 그저 가만히 지켜보며 조롱과 품평을 일삼았다. 나는 계단 위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몰랐고, 왜 올라가야 하는지 점점 더 알 수 없어서 이 모든 행위가 피로해졌다.
그래서 모든 걸 그만두기로 했다. 더 이상 TV에 나오는 아이돌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내게 우상 같았던 여자 아이돌의 모습을 봐도 '얼마나 불편했을까, 힘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미디어를 멀리하니 올려다보았던 대상이 없어져서 '나'를 보게 되었고, 나를 채울 수 있는 것을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할 때 가장 기쁜지 천천히 알아갔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던 시간을 스스로 단단히 만드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성인이 되었다. 변화는 느렸지만 조금씩 나타났다. 틀 안에 갇힌 여성의 모습을 소비하는 주류문화는 여전했지만 어느 팬덤 내에서는 지나치게 선정적인 무대 등에 대한 피드백 움직임이 있기도 했고, 시대의 흐름을 반영한 컨셉들이 더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자 아이돌의 멤버들이 개인적으로 보여주는 의식 있는 행보나 언어를 보며 힘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퀸덤>에 AOA가 등장했다. 엠넷에서 하는 음악 프로그램인 <퀸덤>은 여성 아이돌을 모아 컴백 전쟁이라는 테마로 경쟁을 시켰다. 1화를 슬쩍 봤을 때 엠넷의 치졸한 연출과 편집으로 ‘여자들의 기싸움' 구도를 만들려고 하는 게 빤히 보여서 관심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웬걸, 타 아이돌의 노래를 커버하는 주제로 방송된 3화에서 AOA가 마마무의 <너나 해>라는 노래를 커버해 역사적인 퍼포먼스를 했다.
내게 AOA라는 아이돌은 ‘짧은 치마' 와 ‘단발머리' 를 하고 ‘사뿐사뿐' 걸어가는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 닮고 싶었던 판에 박힌 아이돌인 AOA였으니, 이번이라고 뭐 다를 게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달랐다. 그들은 여자 아이돌의 무대 의상으로는 보기 힘들었던 긴 슈트를 입고 무대에 섰다. 래퍼인 지민이 ‘나는 꽃이 아냐, 나무야‘ 라고 랩을 하며 노래의 서문을 열었고, ‘너의 품에서 벗어나 내 멋대로 살아갈래' 라고 선언하는 하이라이트 파트에선 그동안 미디어에서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여줬다. 짧고 파인 옷을 입은 남성 퍼포머들이 등장해서 슈트를 입은 AOA와 합을 맞춰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이다. 강요되었던 성 역할이 완벽히 뒤바뀐 모습이었다.
여성 아이돌이 그런 무대를 하는 것을 한번도 본 적이 없어서 영상을 보는 동안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무대의 의미는 뚜렷하게 드러났고 여기가 한국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을 정도니까. 엠넷이 만들려고 하는 이미지와 완벽히 빗나가서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었다. 기획사 없이 여자 아이돌이 정말 하고 싶었던 무대를 하게 만드니 그동안 고수했던 아기자기한 이미지를 벗어던졌다.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었던 높은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원래 그래야했었던 것 처럼.
모두가 AOA처럼 퍼포먼스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틀을 벗어나 자신의 멋대로 퍼포먼스를 보여준 AOA같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여성의 다양한 모습들을 여자 아이돌을 통해서 보고 싶다.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 그것이 꼭 <퀸덤>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냥 음악 프로그램을 틀어도 자유롭게 ‘오빠의 사랑’이 아닌 세상을 꿈꾸는 여성들이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 아이돌은 우상이니까. 진정한 모두의 우상이 될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