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며칠 내내 장맛비만 내리고 있네. 나에게 여름은 전기세 걱정인데 너에게 여름은 방학이구나. 그래서 느닷없이 우리집에 놀러와 에어컨을 빵빵 틀고 있는 걸까? 아빠가 동생 올라가니 둘이 놀러 다니라며 휴가비를 줬는데 그 돈 다 한전에게 다 갖다바칠 판이야. 호호.
거의 반 년 만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나는 대뜸 “너 이제 몇 학년이지?”라고 물었어. 너는 심드렁하게 “고 2”라고 말했지. 고등학교 2학년. 당장 내년에 수능을 치는데 실감은 안 나고 마음만 깝깝-한 상태라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어.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처럼 이번에도 “아, 그렇구나.”라고 짧게 맞장구만 쳤지. 그 뒤로 아주 긴 긴 정적이 오려는 즈음, 너는 양쪽 귓구멍에 이어폰을 꼈어. 밖에는 빗소리만 들리고, 우리는 각자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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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막 중학교에 들어간 무렵, 나는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서울로 훌쩍 떠나버렸어. 그렇게 사 년 내내 몇 달에 한 번 씩 얼굴만 비추고 또 금방 가버렸지. 그 즈음 너는 성적 문제로 아빠와 사이가 나빠졌고, 엄마는 대학생활이 바빠 가족 모두 너에게 소홀했어. 그때부터 너는 네 방 밖으로 잘 나오지 않았던 것 같아. 내가 거부했던 학교생활을 너는 지루하게, 또 억지로 하고 있었고 나는 그냥 잘 지내겠거니- 하고 멋대로 생각했어. 너와 대화를 많이 했어야 했는데, 이제야 후회가 돼.
너가 서울에 올라 온 날, 우리는 “하루 밥 두끼는 챙겨 먹자!”는 규칙만 두고 그 밖에 계획은 세우지 않았어. 너는 하루에 최소 여섯 시간은 게임을 하는 것 같았고 숙제는 챙겨오지 않은 게 확실했어. 친구들과 게임할 때는 전화를, 웃긴 짤을 공유할 때는 카톡을 쓰고 유튜브는 시간 때우기나 게임 용어 배울 때 본다고 했어. 놀랍게도 고민은 딱히 없고, 학교는 아무 의미없이 시간 죽이기만 하는 곳이라고 했지. 태풍 올 때 우리 학교 좀 쓸어갔으면 좋겠다, 학원이 그냥 터져버렸으면 좋겠다, 이런 말을 내내 입에 달고 산다고.
너는 학교에서 배우는 건 ‘무관심’ 뿐이라고 말했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업도 관심 없지만, 쉬는 시간만 되면 큰 목소리로 여성혐오를 쏟아내는 남자애들도 싫다고 했어. 친한 친구들은 다 다른 반이라 말 통하는 친구도 없고, 반에서 겉돌다보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딱히 신경쓰지 않아. 공부를 월등히 잘하지도, 그렇다고 바닥을 깔지도 않으니 이런 애들은 선생님도 별 관심 없고 학교도 마찬가지. 엄청 잘하는 것도 없는데 하고싶은 것도 아직 못 찾았다며 혀만 끌끌 차. 이런 무관심 속에 우리가 배우는 건 포기와 무기력, 반항 그런 것 뿐인데 어른들은 맨날 열심히 하라고만 하니까 차라리 이어폰을 꼽고 말아. 꿈, 노력, 목표 같은 소리하네. 그냥 이번 생은 망한 거야.
도대체가 말이야. 우리는 이곳에서 행복할 수 없는 걸까. 스스로에게 등급을 매기지 않고 공부할 순 없을까. 머리에 꾸역꾸역 밀어넣어 정답만 빠르게 찍어내는 시험을 거부할 순 없을까. 대학이니, 취업이니 하는 말에 좌절하지 않고 ‘나는 이게 하고 싶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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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따라 학교를 자퇴하고 싶다고 했어. 여기는 네게 아무 의미가 없는 곳이라고. 멍 때리면서 시간낭비할 바에야 기술을 배우든 일을 해서 차라리 돈을 벌고 싶다고 했지. 나는 ‘안타깝게도 한국은 청소년에게 제 돈 주고 기술직을 시키고 싶어하지 않아.’ 라는 말을 전하는 게 좋을까, 하다 일단 입을 다물었어.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여러 대안적인 교육공동체 중 네가 마음이 가는 곳을 충분히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도 찾는 걸 도와줄 거고. ‘학교 밖=기술 훈련=돈 벌기’ 라는 너의 상상 너머 새로운 사람들과 더 많은 일들을 시도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맞아, 자퇴는 ‘이생망’에서 너를 구해준다기 보다 지금까지 전혀 상상해본 적 없던 삶의 시작에 가까워. 매일 정해져있던 장소와 시간, 항상 이야기가 잘 통했던 사람들, 누가 시켜서 억지로라도 했던 일이 다 사라지고 달랑 남은 건 네 자신과 너의 선택 뿐-이라고 하면 조금 겁이 나려나? 무엇보다 어떤 선택이든 너에게 마냥 반갑고 행복한 상황만 펼쳐지지 않을 거야. 절-대. 남들이 다 가는 길을 포기한 후, 나만의 길을 찾기 위한 고민은 너를 막막하게 만들 것이고 그러다 언젠가는 그렇게 재밌던 게임을 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한 상태가 올 수 있지. 오 이런! 겁주려는 말은 아니고 사실 나의 경험담이야.
탈학교 생활 3년차에 접어들면서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나? 나 괜찮은 거 맞나?’하는 고민을 하루에도 수십번 씩 하곤 했어. 부모님 등쌀에 어영부영 검정고시는 쳤는데 대학 갈 생각은 없고, 듣고 싶은 강연이나 워크숍은 너무 비싸고, 꾸역꾸역 생계형 알바로 버티며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무력감도 심해졌지. 취업이 목적이 아닌 대학 밖 청년들의 삶은 이 사회에 거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정말 당장 오늘 무슨 일을 할 것인지부터 고민해야 했지. 게임은 편한 선택이었지만 대부분 끝이 좋지 않았어.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는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모임, 강연, 워크숍 등을 찾아다녔어. 내가 안전하고 편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마음 맞는 사람들과 실컷 이야기하고 오면 그날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더라. 근황을 나누고 고민을 털어놓고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의 공감으로 이어지는 관계. 너에게도 이런 관계가 차곡차곡 쌓였으면 좋겠다. 학교 밖이든 안에서든 꼭. 정 없다 싶으면 나한테 와도 되고. 너도 냉장고 열어봐서 알겠지만 우리 집엔 항상 술이 있거든. 알코올은 좋은 친구지.
부모님과 자퇴에 대해 논의하겠다면 정말 술이 조금 필요할지도 몰라. 자식 자랑을 성적과 대학으로 하는 분들에게 그 모든 것을 거부하겠다는 선언은 감히 용납할 수 없을 테니까. 엄청 다투더라도 결국 ‘허락’을 구해야 하는 건 그들이 나의 부모이고 어쩔 수 없이 경제적 지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일 거야. 그들을 어떻게 설득할지 고민하는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탈학교는 나 혼자만의 결정이 아니라, 보호자와 함께 하는 결정이라는 걸 꼭 이해해줬으면 해. 그들도 또한 지금까지 전혀 상상해본 적 없었던 새로운 시도이자 두렵고 막막한 마음이 앞서는 도전이라는 걸 말이야. 자식이 갑자기 충격적인 말을 해서 놀란 부모들에게는 <요즘 아이들 마음 고생의 이유>라는 책을 권해드리고 싶어. 사실 크게 놀랄 일이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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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자퇴한 뒤 가장 많이 들은 질문은 “왜 자퇴했어?”였어. 처음에는 진짜 몰라서 물어보나 싶더라. 다들 하고 싶던 거 아니었나?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기 싫어서요”라고 얼버무렸지. 다들 입모아 외쳤어. “요즘은 평범하게 살기도 힘든 세상인데!” 나는 갸우뚱했어. “힘들면 안하면 되지 않나요? 안 평범하게 살면 뭐 어때요.”
맞아, 안 평범하면 뭐 어때. 그래도 우리의 삶은 계속 될 거고 세상 사람들 똑똑히 보란 듯이 살테니까.
올해 안에 결판을 낼 거라며 사뭇 비장하게 서울을 떠난 너는 과연 무사히 올해를 보낼 수 있을지. 그와중에 다음 학기에 제주도로 수학여행 갈 거 생각하더라. 벌써 코스도 다 외우고. 흐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