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자글방은 함께 읽고 쓰고 합평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발견해가는 청소년 글쓰기 커뮤니티입니다. 정규 과정 이후 2개의 후속모임이 진행 중이며 후속모임에서 나온 글 중 일부를 구독자분들과 나눕니다.
5월의 글감은 ‘나를 거쳐온 것들로부터 독립하기’입니다. 휴일이 많은 5월은 흔히 가정의 달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가정’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늘 “지금 여러분의 가정은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으며 끝나던 막장 단막극이 생각나고는 합니다. 불행과 해체를 잔뜩 보여주고는 행복을 묻다니! 하지만 우습게도 저에게 가정이라는 단어를 처음 생각하게 했던 것은 어릴 적 들었던 그 문장임이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어떤 단어들은 너무도 크고 어려워서 자꾸만 무언가를 빗대어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저희 또한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이 어려운 단어에 지금 저희 근처에 있는 단어들을 모아보았는데요. 얼핏 5월과 멀게만 느껴지는 이 단어들을 읽어내며 함께 5월 된 마음을 차분히 느껴보고자 합니다.
- 하자글방 죽돌 퍼핀
뭍으로 나가면*
헤어진 애인에게 빈 편지지를 보냈다.
애인을 생각하면 역시 그 방이 떠오른다. 크기를 재어본 적은 없지만 매트리스 한 장이면 가득 차는, 아마도 6평 남짓한 그 방. 자고 있는 애인을 깨우지 않기 위해 퇴근 후에는 발꿈치를 들어 걷다가도 결국은 늘 매트리스를 밟아버려 인사를 듣게 되는 방. 온도 조절이 되지 않는 조금 멍청한 줄무늬의 코타츠 이불. 고장 난 전기 열에 잔뜩 익은 피부를 식히기 위해 이불 위에 다리를 올리고 새벽마다 나누던 대화들. 그러면 어김없이 들리는 빗소리. 옆집 아저씨가 물을 내리는 소리, 양치를 하는 소리. 모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
한국에 비가 내리면 하루 후 어김없이 이곳에도 비가 내린다. 어떤 예보보다도 정확하게. 비가 내릴 때마다 내가 딱 하루 정도의 거리만큼만 한국과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애인이 넘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응급실에 다녀온 이틀 후에서야. 현관에서 비에 젖은 우산의 물기를 털어 내다가 그랬다고 했다. 갈비뼈 두 개에 금이 갔다고 했다. 갈비뼈는 시간이 지나면 스스로 제자리를 찾는다고 했다. 모두 이틀 전의 일이었다고 했다. 더 물을 수가 없어 알았다고만 했다. 이곳에도 이미 비가 내린 후였다.
우산을 두고 온 탓에 잔뜩 비를 맞으며 뛰어가다가 늘 인사를 나누던 길고양이를 만나버린 적이 있다. 사람이 보일 때마다 겁도 없이 벌러덩 배를 보여주던, 털에 손을 부비면 한쪽 발을 들어 그 손을 잡아주던, 그 고양이. 하지만 비를 흠뻑 맞아 축 처진 털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그 고양이. 비를 피하는 법을 모르는, 비를 피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하지 못한 길고양이는 오래 살지 못한다고,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들키지 않고 싶었던 것을 들킨 기분이었다.
애인과의 집을 정리하던 그날밤에도 고양이를 만났다. 거짓말 같은 문장처럼. 혼자 가방에 짐을 욱여넣고 있는데 발코니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놀란 마음으로 커튼을 걷었더니 정말로 고양이가 있었다. 아주 작은 그 고양이. 이중창의 잠금장치를 열심히 풀어냈다. 문을 열었지만 고양이는 집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저 그 자리에서 계속 울기만 했다. 감기에 걸려 울음 사이에 고롱, 고롱 코를 긁는 소리가 났다. 옆에 함께 주저앉아 고양이를 계속 쓰다듬었다. 고양이에게 비가 오면 분리수거장 뒤편으로 가라고 했다. 그곳에는 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가림막이 있다고. 누군가 그곳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하면 머리를 다리에 문대라고 했다. 그리고 힘껏 울라고 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날은 한국에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헤어진 애인에게 택배를 무사히 받았다는 연락이 왔다. 애인은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어쩐지 두고 온 고양이가 보고 싶어졌다.
:: 글_ 퍼핀(하자글방 죽돌)
*2019년 발매된 김훨의 앨범 《초심(初心)》에 수록된 곡 <뭍으로>의 가사를 인용. 함께 읽고자 하는 가사는 다음과 같다. “뭍으로 나가면 제일 먼저/차가운 물 다 씻어내고/아름다웠던 따스한 빛/온몸으로 받아내야지 … 계절도 사람도 웅크러드는/겨울은 아녔음 좋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