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Z. 잘 지내? 오늘은 우리 집에 대한 이야기로 먼저 시작을 해볼게. 내가 사는 곳은 경기도의 어느 시골 마을인데, 우리 집이 있는 곳은 온통 산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우리집과 우리집 윗층 외에는 아무도 살지 않아. 외진 곳인데다가 길이 잘 되어있지 않아서 버스도 들어오지 않고. 아무도 없는 외딴 곳에 산다는 건 속옷 빨래를 밖에 널어 놓아도 신경쓰일 게 없고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를 때 누가 볼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지만, 집에 혼자 있는 것은 너무나 겁이 나게 되는 일이야. 날씨가 아무리 좋아도 혼자 집에 있을 땐 창문을 잘 열지 않아. 우리 가족의 것이 아닌 다른 차가 마당으로 들어온다? 누구인지 확인도 전에 전화기에 엄마 번호를 눌러놓지. 밤에는 가끔 집 뒷 산에 사냥꾼들이 찾아 와. 고라니, 멧돼지 같은 것들을 잡는다고 오는 건데 자려고 침대에 누워있으면 탕-탕- 하는 폭발음 같은게 나기도 해. 그런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좀 많은 상상을 해. '만약 저 낯선 차에서 내린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어떡하지?’, '밤 늦게 집 주변을 돌아다니는 아저씨들이 나를 해코지 하려 하면 어떡하지?’하는 상상들 말이야. 그런 걱정 때문에 밤 잠을 설치기도 하지. 누구는 내가 하는 생각들이 터무니 없다고 느낄 수 있겠지만, 알잖아. 내가 상상하는 일들이 결코 판타지가 아니라는거. 그런 상상을 자꾸 하다보면 결국엔 내 마음이 조금 삐뚤어지고 말아. 내가 이런 걱정을 하는 동안 오빠는 속 편히 자고 있을텐데, 오빠는 집에 혼자 있는 걸 정말 좋아하던데. 그 차이를 깨달을 때면 난 집채만한 무기력감에 잠겨버리는거야.
우리 동네에서!
그 차이를 깨닫는 일은 비단 집에서만 있는 게 아니야. 올해 겨울에 엄마가 나에게 선물이라며 후추 스프레이를 건넸어. 쓸 일이 없길 바라면서도 언제든 날 지킬 수 있는 건 필요하단 생각에 집 밖을 나갈 때마다 그 스프레이를 들고 다녔지. 어쩌다 깜깜한 길을 걷게 되면 이어폰은 무슨. 한 손엔 112가 눌려져 있는 전화기를, 한 손엔 후추 스프레이를 당장이라도 쏠 수 있는 모양으로 잡고 있어. 겁이 많은 나는 2분도 채 안 걸리는 거리를 걷는 동안 온 몸이 축축해질만큼 식은땀을 한가득 흘리고,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만큼 빠른 걸음을 해. 그 와중에 내 옆으로 누군가 지나가거나 내 뒤로 인기척이 느껴지면 왈칵 눈물이 터져버리곤 하는거야. 그런데 내가 가끔 이런 이야기를 남자들에게 하면 대부분 의아한 표정을 짓더라. '그게 왜?’라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는 거야. 정말 ‘그게 왜?’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후추스프레이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밤길을 걷는 동안 내 옆을 지나간, 내 뒤를 걸어오던 남자들은 아무 걱정 없이 이어폰을 끼고 노래도 들어가며 걸었던 거야. 참 불공평하지. 같은 상황에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타인이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나 상반된다니. 이런 사실이 상기될 때 느끼는 무력감과 상실감은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어.
최근에 크게 무기력함을 느낀 경우는 정준영과 최종훈의 집단 성폭행 사건이 2심에서 감형되어 각각 징역 5년, 2년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야. 이 사건이 알려졌을 때 나와 많은 사람들은 확실한 규탄과 엄중한 처벌을 요구하고 목소리 냈었어. 그런데 왜인지 판결은 솜방망이라고 하기도 어설플만큼 가볍기 그지없지. 이런 일이 이번 뿐일까? 약물 강간과 집단 성범죄 등으로 논란이 된 클럽 버닝썬을 운영한 승리는 두차례 구속이 기각되면서 그대로 군대로 도망가 버렸어. 2008년 미성년자를 폭행, 성폭행 하여 세상을 분노케 한 조두순은 올해 12월, 12년의 형기가 만료되어 출소하게 된대. 이런 일이 수도 없이 반복되면서 나는 조금 지쳐버린 것 같아. 범죄가 일어난 순간엔 타오를 듯 분노하고, 함께 투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보며 희망을 품고, 말미에는 기대의 반의 반도 못 미치는 결과를 보며 좌절하고. 그래서 이제는 어떤 범죄 사건이 일어나면 ‘이번엔 과연 몇년 형이나 받으려나. 징역은 살까?’하는 생각을 하기도 해. 항상 같은 일이 되풀이 되니까. 그럼에도 도저히 두고볼수만은 없어서 다시 또 화내고 소리치고 싸우긴 하지만 말이야.
무기력한 감정은 정말 싫어. 무언가가 나를 아무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없게끔 집어삼킨 기분이 들잖아. 게다가 이 기분은 도저히 익숙해지지가 않아서 늘 초면인 것처럼 맞이하게 되지. Z는 어떤 일에서 무기력감을 느끼는지, 나의 이야기에 공감이 되는지 궁금하다. 우리가 함께 이야기하고 움직이다보면 Z의 무기력도, 나의 무기력도 언젠간 옛날의 기억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