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잘 지냈냐는 말은 단지 지나가는 인사말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 같아. 주변 사람들이 정말 ‘잘 지내는지’를 걱정하게 하는 일들이 숨 돌릴 새도 없이 이어지잖아.
n번방 사건을 접한 너의 마음은 괜찮을지 걱정이다. 뉴스를 접하고 나는 한동안 우울감을 느꼈어. ‘텔레그램’ 메신저 속 ‘n번방’, ‘박사방’과 같은 대화방들 속에서 수만, 수십만 명이 청소년을 포함한 피해자들을 협박하고, 강간하고, 학대하며 피해 영상들을 내려받고 유포했어. 26만이라는 가해자의 숫자가 실감나지 않았지만, 동시에 n번방 사건은 우리의 일상과 멀리 떨어진 ‘남 일’로 느껴지지도 않았어. ‘장난이었을 거야’, ‘남자애들이 원래 그렇지’ 같은 말들로 넘어간 수많은 일상의 폭력들은 분명 n번방과 크게 다르지 않았거든. 내가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 실감하면서 스트레스와 우울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 같다는 무력감이 찾아왔어.
하지만 동료들과 1인시위에 참여하고, n번방 사건에 관해 이야기 나누면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n번방 사건을 접한 이후 정신적으로 힘들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 n번방 사건이 우리와 맞닿아 있는 일이라는 확신도 생겼지.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분노하는 일은 분노가 우울감이나 무력감을 넘어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어. 그날 받은 힘이 내 감정을 긍정하고 내가 느낀 n번방에 관해 쓸 수 있게 해준 것 같아.
얼마 전 n번방 운영자인 와치맨, 조주빈에 이어 ‘갓갓’도 검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 인터넷에는 그들을 ‘악마’라고 칭하는 글이 가득하더라. 가해자가 한 말들은 기사를 통해 끝없이 퍼져나가고 있어. 하지만 우리는 가해자의 자서전을 보고 싶은 게 아닐뿐더러, 악마라고 부르기에 26만은 너무 큰 숫자인 것 같아. 물론 텔레그램 밖에도 수많은 ‘n번방’들이 있고 말이야.
무엇보다 n번방 운영자들과 가담자들은 악마도, 괴물도 아닌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이야. ‘장난’으로 몸평(몸매평가)을 하고 여성의 순위를 매기며, 단톡방에서 성희롱을 주고받는, 강간과 불법 촬영물을 ‘야동’이라고 부르는 ‘평범한’ 사람들 말이야. 그리고 그들이 ‘평범한’ 만큼 우리가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 폭력들은 우리에게 일상화되어있어.
나는 일상화된 폭력과 그 원인인 우리를 둘러싼 여성혐오와 강간문화가 너무 싫어. 여성을 성적 쾌락의 도구로 보는 시각과 ‘동의’ 없는 스킨쉽과 섹스,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고 검증하려는 사회적 분위기. 이 오래된 문화는 언제쯤 사라질까?
n번방은 ‘무서운 요즘 애들’만의 새로운 범죄가 아니야. 오래된 문화만큼이나 오랫동안 끊이지 않은 온갖 성범죄들의 뒤를 잇는 다른 이름일 뿐이지. 소라넷, 버닝썬, 수많은 불법촬영. 그간 이런 범죄들의 처벌은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았어. 그런 판결과 사회 분위기는 계속해서 새로운 범죄를 만들어냈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생겨났어.
이번 사건에서도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왜 ‘일탈계’를 했는지 질문해. 피해자의 행동이 범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당연한 이야기는 대체 언제쯤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될까? 언제쯤 피해자들은 2차 가해와 낙인, 부족한 성인지 감수성을 걱정하지 않고 피해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덧붙여서, 여성 청소년에게 안전하게 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과연 존재했을까? 나는 여성 청소년의 성이 왜 ‘일탈계’ 속에서, 획일적인 방식으로밖에 이야기될 수 없었을지 묻고 싶어.
여성 청소년에게 성은 금기시되어있고, 심지어는 성과 관련된 피해 사실을 말하는 것조차 어려워.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일탈계’ 활동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협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지. 피해자들은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처벌과 폭력을 걱정해야 했어.
이제는 피해자가 낙인이나 2차 가해를 두려워하지 않고 피해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마련되면 좋겠어. 그리고 n번방의 가해자들이 제대로 된 처벌을 받고, 피해자들이 지원받는 것을 넘어, 청소년에게 성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바뀌길 바라. 무엇보다 계속해서 이런 범죄들을 만들어낸 강간문화, 일상화된 폭력의 풍경들이 바뀌었으면 해. 더 많은 ‘n번방’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말이야.